‘문화란 우리에겐 결핍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볼프랑 엥엘스라는 사람이다.

선입관이란 참 무섭다. 십 수 년 전의 일이다. 언론사의 한 선배가 홍길동의 진실 추적에 푹 빠진 경우를 보았었다. 그의 요점은 홍길동이 장성을 배경으로 활동한 실제 인물이란다. 나도 어린 시절 <홍길동전>을 읽으면서 흥미진진해 했다. 그리고 이 작품의 활동 무대로 호랑이가 나오는 첩첩산중을 연상했었다. 당연히 어디 백두산 밑이나 함경도 깊은 오지의 먼 고을이야기려니 했다.

그러니 지근에 있는 장성이 홍길동의 고향이라는 그의 주장에 쉽게 수긍이 가지 않았었다. 그런 주위 사람들을 설득하고 근거를 만들면서 노력하는 선배가 당시에는 우직하고 안타까웠던 기억이 새롭다. 어찌되었던지 그런 선배의 노력 덕이었는지는 몰라도 이제 장성의 스토리텔링에서는 반드시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만날 수 있다.

허준은 호남에서 활동했다

요즘 허준이 다시 뜬다. 벌써 새로운 구성과 배역으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방영되고 있다. 어린 시절에 드라마 <집념>을 보았고, 청소년기와 장년기에 드라마 <허준>을 보았었다. 그래서일까? 허준의 고향이나 활동 배경에 대해 별로 의문을 가져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최근 새로운 허준에 대한 연구들이 속속 보고되고 있다. 드라마에서 속의 허준의 배경이 되는 산청과 산음 등의 경상도 지명들은 실제로는 허준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허준의 청년 시절과 문화적인 성장 배경에는 호남이 더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상황 설정의 무대라는 것이다.

조선의 명의, 허준이 성장과 젊어서의 활동이 호남, 특히 담양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명의였을 것이란 주장이 역사학자와 일부 한의사들 사이에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한방의학에서도 호남 소외 현상이?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는 허준의 외가가 담양이었다는 주장이다. 당시의 육아나 교육의 풍습에는 유소년기를 주로 외가댁에서 보내는 경향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허준을 중앙 무대에 천거한 인물로 거론되는 미암 유희춘은 주요 활동 무대가 해남과 담양 등이었다. 한 마디로 호남 인맥의 대표성을 띄었다는 사실이다.

한편 허준이 남원의 신흔이란 인물을 진료한 기록도 존재한다. 이처럼 인맥이나 의료 활동의 배경 등이 호남 인맥에 편향되어 있었던 점 등을 들어 그를 호남과 연계된 인물로 설정하고 있다.

허준과 동시대에 실존했던 명의 중에는 호남의 배경설의 주인공이 더 있다. <침구경험방>이란 저서를 남겨 침구술의 대가로 이름났던 명의 허임이다. 그는 나주를 근거로 활동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기록에 허임이 나주로 내려갔다는 실제 내용이 있으며, 나주에는 허임에 대한 구전되는 일화도 많이 전한다. 그런데도 허임의 고향이 충청도로 전해지면서 충청도 활동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한방의학에서도 호남과 남도가 정치적인 위상만큼이나 소외되어가는 느낌이다. 예로부터 전라도는 넓은 평야와 서남해의 바다와 동북의 산맥으로 인하여 생산되는 물산이 풍부하고 음식 등의 식문화가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한의학의 재료가 되는 약재와 축적된 지식이 타 지역에 비하여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을마다 허준이나 허임과 같은 명의가 있었으며 일반인들의 한방의 선호도와 신뢰도 또한 높았었다.

한방은 문화 자산이자 경제 자산

한방은 의료이자 문화적인 자산이다. 현대 생활 속에 건강한 삶의 지혜가 대부분 한방의 의학적인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축적되어 왔다. 그래서 문화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제 한방의 중심에 호남을 한번 설정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지역에 발굴되지 않은 한방 문화유산을 찾아내고 발전시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문화의 모태가 되는 한의학 박물관도 좋다. 우리나라에는 한방 관련 박물관이 3개밖에 없다. 서울 강서구의 허준 박물관은 한 해에 60만 명이 찾는 지역의 명소이자 문화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각종 체험 행사와 연구적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산청에서는 금년에 한방 박람회를 개최한다. 중앙정부 예산만 200억이 지원된다. 전국을 상대로 홍보와 유치에 적극적이다.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박람회와 한약 관련 상품의 개발 및 관광 상품 등, 한방 관련으로 인한 경제적인 혜택이 불과 수만 명의 산청군민에게 돌아간단다. 한방 문화가 지역 경제를 해결해주고 있는 것이다.

한방문화에 관심을 갖자. 작은 소재일지라도 스토리텔링을 만들자. 박물관과 힐링 한방 체험관, 한약 재배 단지와 한방 산업의 육성 등의 많은 문화적인 테마가 있다. 경제적인 가치도 무궁하다. 한방 문화에 대한 지역민의 관심과 지자체의 의지가 아쉽다. 한방 문화란 호남에게는 결핍과 같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대동문화 76호 [2013 5.6월호]

안수기 대웅한방병원 병원장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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