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의 먼지였을까.

서효인 시인

골목은 참 컸다. 골목은 길었다. 골목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골목은 어디로든 연결되고, 급작스레 끝나지만 언제라도 다시 열린다. 골목은 사람의 몸처럼 손을 대면 따뜻하지만 멀어지면 복잡한 심사를 가늠할 수 없다. 골목은 우리의 여러 삶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간다. 모이고 흩어진다. 골목의 어귀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사랑을 나누었을 것이다.

가족이 아닌 인간을 만난 최초의 장소 역시 골목이었다. 미운 여섯 살들은 참새처럼 모였다. 짹짹거렸다. 골목과 바투 붙은 친구의 집 대문 앞에 서서 최대한 목청을 쥐어짜서 친구의 이름을 부른다. 한낮의 골목은 꼬마들 악 지르는 소리, 우는 소리, 웃는 소리가 뒤엉켰다.

시끄러움 속에서 아이들은 키가 컸다. 그때의 부모는 아이들을 내버려둘 줄 알았다. 우리 집은 특히 그랬다. 골목의 아이들은 알아서 잘 자란다. 당신처럼 나처럼. 계속해서 ○○이를 부른다. ○○아 놀자! ○○아 뭐하니? 나오지 않는다. 이윽고 들리는 아주머니의 앙칼진 목소리, “우리 ○○이는 공부한다. 너희들끼리 놀아!”

학교를 가고 학교에서 오는 길도 골목이었다.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신났다. 소리를 지르며 신발주머니를 뱅뱅 돌렸다. 학교가 파하는 오전반 아이들과 이제 학교에 가는 오후반 아이들이 갯벌의 작은 생물처럼 바지런히 움직였다. 유행가를 따라 불렀다. 외로움 두고서 가지는 마, 남겨진 시간이 너무 많아. 혹은, 왜 난 이리 널 그리는 걸까, 왜 내 모습 보이지 않는 걸까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약간 주춤했지만, 그게 뭔지는 몰랐다. 그저 부끄러운 구름이었다.

낯 뜨거운 태양이었다. 서늘한 그늘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았다. 구름도 태양도 그늘도 아닌 시간을 지나갔다. 등에는 커다란 가방이 있었고, 사랑을 나눌 것 같은 집을 골라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갔다. 등에서 가방이 덜그럭 거렸다. 손에 쥔 신발주머니가 무거웠다. 나는 골목에서 가장 빠른 어린이였다.

15번지. 스트리트 파이터 ,18번지. 골목의 끝 성당에서

격투 게임을 했다. 오락실은 어두컴컴했고, 오락기의 화면은 밝았다. 밝은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어두움을 관통해야 했다. 어둠을 지키기 위해 오락실 출입구에는 두꺼운 발이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발을 걷고 들어온 누군가의 어머니는 오락을 하는 아들의 굽은 등을 내리쳤다. 아들의 오른쪽 귀를 잡고 골목을 지나쳐 돌아갔다. 아들의 비명소리가 골목의 안쪽으로 사라졌다. 오락실에서 우린 모두 파이터였다.

세계의 골목을 주유하며 싸웠다. 전 세계 각양각지의 파이터들이 화면 속에 있었다. 동전이 다 떨어지고, 진짜 스트리트로 나오면, 어떤 형들이 슬쩍 우리를 불렀다. “있는 돈 다 내놔, 뒤져서 나오면 백 원에 한 대씩 맞는 거다.” 오락실 안의 스트리트에서는 1:1의 방식으로 정정당당하게 싸웠지만 오락실 바깥 진짜 골목은 그렇지 않았다. 돈을 뺏기고 점퍼를 뺏기고 그렇게 유년이 갔다.

성당에 가는 주말엔 여자애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남중과 남고를 나오면서 선생님들에게 자주 얻어맞았다. 선배들에게 자주 얻어터졌다. 같은 도시의 어떤 여고를 다니던 은영이는 성당 친구였다. 큰 눈이 짙은 쌍꺼풀 안에 자리했고 염색을 하지 않아도 머리칼은 약간 갈색이었다. 공부는 썩 잘하진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은영이를 좋아했다. 은영이는 선배를 좋아했고, 내 맘은 몰랐던 것 같다. 아니다. 알았던 것 같다. 은영이는 허구한 날 나를 불렀다. 은영이는 좋아하는 선배와 사귀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나를 불러서 성당 뒤 골목에 앉아 몰래 맥주를 마셨다. 물론 내가 샀다. 집까지 걸어서 데려다주었다. 은영이네 집은 멀었고, 골목 다음의 골목, 그리고 또 골목을 걷고 걸어서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어야 했다. 나는 좋았다. 그냥 듣고만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졸업했고, 몇 년 뒤 우연히 한번쯤 너를 본 것 같지만 알은체하지 않았다. 너는 그때 무슨 마음이었니. 나는 골목의 끝에 홀로 선 심정이었어.

21번지. 길 건너 무지개 당구장으로, 27번지. 낯선 도시의 익숙한 골목을 지나

엉겁결에 들어간 대학은 뒷골목을 품고 있었다. 쪽문에서부터 시작하는 뒷골목들은 믿을 수 없이 복잡했다. 선배들은 술에 만취해서 걸었다. 모두 함께 비틀거렸다. 세상은 제대로 되는 게 없어보였다. 이상한 시절이었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값이 싼 포장마차가 줄지어 있었고 그 보다 더 구석에 당구장이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대학은 가르쳐주지 않았고, 나 역시 대학이 원하는 인재는 아니었다. 연애를 걸었던 여자들은 몇 번 당구를 구경하더니 쉽게 떠나갔다. 봄꽃과 낙엽을 한 번씩 봤을 뿐인데, 군대에 갈 시간이 되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려 급한 숨을 몰아쉬는 남자가 되었다. 인생을 낭비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었다. 나는 곧 이등병이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나 가까스로 취직에 성공했다. 대신 낯선 도시의 구석진 골목에 있는 반지하 방을 거처로 삼아야 했다. 내가 살던 도시에는 땅속에 들어간 방은 없었다. 한가하고 때로는 황량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햇빛을 보고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낯선 도시의 골목은 달랐다. 건물들은 비슷한 다른 건물들과 최대한 바투 붙어 있었고, 이웃의 목소리가 들렸으며 이상하게도 모두 앙칼졌다.

장마는 끝날 줄 몰랐다. 쏟아지고 그치고를 반복하는 비 사이, 노인들이 박스를 주우러 다녔다. 오래된 책을 골목에 내어놓았다. 장마 비에 책이 젖을 새도 없이 재빠른 노인들이 책을 가져갔다. 버려진 책처럼 아침마다 골목을 나섰다. 전철역은 멀리에 있었고, 마을버스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무릎에 우산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골목 같은 버스였다. 자주 흔들렸고, 가끔 부딪혔다.

32번지. 여기 발아래 이곳에서

골목은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며, 삶이 흘러가는 배수로이다. 각자의 방에서 고여 있던 우리의 시간은 골목으로 흘러 타인을 만나고 자신을 확인한다. 아직도 골목은 어쩐지 무섭다. 골목의 어귀에서 안정된 터를 잡기 위해 우리는 이리저리 치인다. 손가락 끝에 신경을 집중하여 골목의 결을 만져본다. 손끝이 잿빛으로 아름다워진다. 생은 결코 무지갯빛이 아니었다.

반짝거리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제 몸 위에 먼지를 쌓아둘 뿐이다. 우리는 서로의 먼지였을까. 쌓이고 쌓여 서로의 몸에 깍지를 낀 사람들. 골목을 가득 채운다. 어떤 사람과 그 사람의 기억이 있기에 골목은 믿을 수 없이 아름답다. 글: 서효인

[대동문화 70호, 2012년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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