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중죄 저지른 부처를 이제껏 존경하다니
사자가 일할하니 여우 골이 박살 났네
절집에서는 치열하게 수행하는 걸 보통 ‘용맹정진(勇猛精進)’이라 말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선방에서 안거하는 수좌들이 마지막 일주일 동안 잠을 한 숨도 안 자고 화두를 드는 걸 일컫지요.
용맹한 중생(짐승)이 무엇입니까. 사자, 호랑이 등이지요. 그래서 절집에서는 사자나 호랑이를 빗댄 말들이 많이 쓰입니다.
선지식이 설법하는 자리는 사자좌(獅子座)입니다. 그가 터트리는 포효는 사자후(獅子吼)입니다. 원래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서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외치는 것을 사자후라 표현했습니다. 부처님을 인사자(人獅子)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그런가하면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동물도 사자입니다. 이번 초파일날 서울시청 앞에 장엄된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이나 법주사 쌍사자석등에서도 사자가 불법을 수호하는 대표 동물로 등장해요.
이런 영향으로 예로부터 선가에서 좀 싹수가 있어 보이는 수좌를 사자 새끼라고 불렀답니다.
봉암사 사자 새끼가 눈을 뜨다
향곡 스님은 성철 청담 자운스님 등과 함께 봉암사 결사를 이끌었던 선지식입니다.
향곡스님이 어느 날 선방에 앉았다가 느닷없이 일어서서 벽력같은 소리로 외쳤답니다.
“봉암사에 사자 새끼 한 마리가 있는데, 눈이 멀었소! 눈이 멀었소!”
자신의 무명(無明)이 못내 한스러워 토해낸 사무친 비명이었지요. 그날 이후 스님은 용맹정진을 거듭해 기어이 한 소식을 했는데 도반이자 스승인 성철스님에게 가 인가를 청했답니다.
두 스님이 뭐라고 한참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주고 받더니만 방문을 박차고 나오면서 향곡 스님이 또 이렇게 소리소리 외쳤대요.
“사자 새끼가 눈을 떴다! 눈을 떴다!”
이런 이야기도 전합니다.
일제 때인 1937년 3월 조선총독부는 전국 31개 본산 주지와 도지사를 모아놓고 본산 주지회의라는 걸 열었습니다. 이른바 ‘사찰령(寺刹令)’을 통과시키기 위한 관제 모임이었지요.
헌병대 감시 하에 미나미 총독이 일본 불교와 조선 불교의 합병에 대한 당위성을 늘어놓고 있는데 만공 스님이 벌떡 일어나 일갈(一喝)을 했더랍니다.
“청정본연한데, 어찌하여 산하대지가 생겨나왔는가? 계율을 어기고 대처토록 한 전 총독 데라우찌는 무간지옥에 떨어져 큰 고통을 받을 것이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
그러고서는 유유히 회의실을 빠져 나왔어요.
그날 밤 만공 스님이 선학원에 갔더니 만해 만해 스님이 맨발로 뛰어나오며 반겼습니다.
“스님의 사자후에 여우 새끼들의 간담이 서늘했겠구만. 할(喝)도 좋지만 한 방(棒)을 먹였더라면 더 좋지 않았겠소?”
이에 만공 스님은 껄껄 웃으며 대꾸했답니다.
“차나 한 잔 들세, 어리석은 곰은 방망이를 쓰지만 영리한 사자는 할을 쓰느니.”
만해 스님이 이를 받아 가로대,
“맞아, 새끼 사자는 호령을 하지만 큰 사자는 그림자만 보이는 법이지….”
선지식들 보살핌으로 중노릇 겨우 합니다
갓 출가한 풋중 때부터 사자 새끼라고 불린 스님이 있었어요. 성수 스님입니다. 그 사자 스님이 일전에 입적했습니다.
호랑이와 사자가 산을 떠났으니 포효가 없는 민둥산이 되었네요.
성수 스님을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늦가을 효봉 선사 기일에는 빠짐없이 송광사를 찾는 성수 스님이었습니다. 추모 법회에서 가끔 효봉 선사와의 인연담을 들려주기도 했지요.
“젊은 혈기로 효봉 노사의 애를 꽤나 썩혀드렸어요. 해인사 선방에서 이레 동안 정진하고 나서 도를 텄다고 방장으로 찾아갔더니 어이가 없으신지 허허 웃으시더군요. 그래도 그 결기를 가상하게 보시고 사자 새끼가 한 마리 나왔다고 격려해 주십디다. 그런 어른들의 보살핌으로 이만이나 중노릇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때의 인연사입니다.
출가한 지 얼마 안 되는 풋중 성수는 도인이라면 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작정 찾아가 법거량을 들이대는 괴각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급기야 가야 총림까지 쳐들어가 하늘같은 종정 스님을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절에서 배려를 해 원주 소임을 맡겼지만 성수 스님은 도를 배우러 왔으니 선방에 들겠다고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것이었어요. 사중 스님들이 기가 막혀하고 있는데 효봉 스님이 나서서 “이레 안에 깨치지 않으면 방장 주장자로 맞아죽어도 좋다는 각서를 쓰라”고 제의하자 선선히 그러겠다고 하고 무문관에 들어갔답니다.
이레 동안 잠과 음식을 끊고 혼절을 해가며 용맹을 내 마지막 날 나름대로 소식을 봤다 하고 방장문을 두드렸대요. “도 가져 왔습니다” 외치면서 소식을 전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그건 아닐세”였습니다.
“성수 도는 이것이니 스님 것을 내놔보시지요.”
“못 써.”
“쓸 데 없고 있고가 따로 있답니까.”
부사리같은 수좌의 우격다짐에 효봉 노사는 그냥 빙긋이 웃으셨다네요.
이런 대분심을 자량으로 성수 스님은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이태 전 부처님 오신 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법문하던 스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네 가지 중죄를 지은 이의 생일을 축하하러 이렇게 모이다니 모두들 제 정신인가. 석가모니 부처님은 왕자로서 나라를 버린 역적이고, 부모 싫다고 집을 나간 불효자이고, 부인을 버리고 야반도주한 패륜아이고, 아들을 내팽개친 무책임한 아비이다. 이런 중죄를 저질러놓고도 3000년을 세인들에게 존경받는 그 신통한 재주를 알겠는가.”
[대동문화 70호, 2012년 5. 6월호]
한송주 월간 송광사 편집장 fig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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