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세상의 희로애락을 고수와 소리꾼 단 두 사람이 연행하는 종합예술인 판소리. 그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무가(巫歌)기원설’, ‘육자배기 토리 기원설’, ‘광대소학지희(廣大笑謔之戱) 기원설’, ‘판놀음 기원설’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일제 강점기 정노식이 주장한 ‘무가(巫歌) 기원설’은 판소리의 뿌리를 경기도 남부를 비롯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서부 지역 시나위권 무당들의 노래에서 찾고 있다. 무가는 넋두리하듯 ‘어정목’을 쓰고, 판소리는 힘이 더 들어가는 ‘패기성음’을 주로 쓴다는 차이는 있지만 장단이나 선율의 구성음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육자배기 토리 기원설’은 판소리의 기원을 무가보다 범위가 넓은 민요에서 찾고 있다. ‘육자배기 토리’가 판소리 중심 선율이라 할 계면조와 같다는 것이다.

‘광대소학지희 기원설’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조 말까지 이어온 궁중의 가장 큰 연례행사인 나례에서 어느 광대가 남도무가의 음악과 양식을 사용하여 설화를 긴 노래로 엮어 부른 데서 시작되었다가 조선 후기에 나례가 폐지되자, 생존을 위한 노력으로 광대들이 고도의 전문성을 확보하면서 발전시켰다는 설이다.

‘판놀음 기원설’은 조선 후기 전문 놀이꾼들이 돈을 받고 벌이던 놀이인 판놀음에서 유랑 연예인인 창우집단(唱優集團)이 불렀던 광대소리를 기원으로 본다. 이 설은 무가와 판소리 사이를 잇는 공연 부문으로 ‘판놀음’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판소리가 남도 지역(시나위권, 혹은 육자배기 토리권) 무가와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생성되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오늘날 전승된 판소리에는 ‘추천목’이나 ‘경드름’과 같은 경기도 민요의 선율이나, ‘메나리조’와 같은 경상도 민요의 선율도 들어 있으며, 한시의 시창이나 시조·가곡성과 같은 사대부 음악인 정악의 요소, 염불과 같은 불교 음악 요소도 들어 있다. 이렇듯 우리 민족의 삶과 문화 속에 깃든 여러 요소들이 시대를 거치면서 두루 녹아든 예술 장르가 판소리다.

가장 민중적인 예술 양식, 판소리초기의 판소리는 민중적인 기반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르는 사람도 민중이고 청중도 주로 민중이었다. 광대라고 불리는 하층 계급 예능인들에 의하여 전승되면서 평민 예술에 바탕을 두었던 판소리는 점차 상류층으로 향유층을 상향 확대하는 양상을 보였다.

18세기 들어 숙종 말 영조 초쯤 서서히 양반 지식인층의 애호를 받게 되는 판소리가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1754년(영조 30년)에 쓰인 <만화본 춘향가>이다. 만화재(晩華齋) 유진한의 문집인 「만화집」가운데 실린 춘향가 200구는 긴 사설을 짧은 한시로 번역한 것으로 ‘결연 -사랑 -이별 -수난 -재회’로 이어지는 줄거리와 인물이 현재의 것과 차이가 없다.

1810년경에 쓰인 송만재의 ‘관우희(觀優戱)’에는 판소리 열두 마당이 등장하며 우춘대, 권삼득, 모흥갑 등 소리꾼의 이름도 나타난다.

長安盛說禹春大 장안에서 이름 높던 우춘대를當世誰能善繼聲 이 시대에 그 명성 이을 자 그 누군가?

一曲樽前千段錦 술자리서 한 곡 불러 천 필 비단을 받는

權三牟甲少年名 권삼득과 모흥갑은 소년 명창이라. -‘관우희’ 49수-

송만재는 자신의 아들이 과거에 급제했는데 가난하여 잔치를 베풀 수가 없어서 이 시로 대신한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판소리가 과거급제 잔치와 같은 자리에서 공연되는 형태로도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판소리의 사설은 설화나 전설, 민담을 그 바탕으로 삼고 있다. 춘향가의 근원설화로는 ‘암행어사설화’, ‘열녀설화’, ‘신원(伸寃)설화’가 있고 그 구성의 근간을 이루는 이른바 ‘관탈민녀(官奪民女)형 설화’ 등이 언급되며, 흥보가는 몽고의 ‘박타는 처녀’가, 수궁가는 ‘불교설화’나 ‘귀토지설(龜兎之說) 등이 근원설화로 언급된다.

춘향가의 근원설화는 조재삼이 1855년(철종 6년)에 완성한 《송남잡지(松南雜識)》에 실린 것이 대표적이다. 남원 부사 아들 이도령이 동기(童妓) 춘양(春陽)과 사랑을 맺은 후 서울로 올라갔으나, 춘양은 수절을 하다가 새 사또인 탁종립에게 죽었는데, 호사가들이 이를 슬퍼하여, 노래를 만들어 춘양의 원한을 풀고 정절을 찬양했다는 내용이다.

명창의 판소리 한 대목에 민족이 울고 웃고

19세기 들어 판소리는 양반 청중들을 대상으로 전성기를 맞았는데, 19세기 전반기를 ‘전기 8명창 시대’, 19세기 후반기를 ‘후기 8명창 시대’라 한다. 전기 8명창에 거론되는 사람들은 권삼득, 송흥록, 염계달, 모흥갑, 고수관, 신만엽, 김제철, 주덕기, 황해천 등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개발한 더늠이나 특별한 선율 형태 등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판소리의 표현력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박유전, 박만순, 이날치, 김세종, 송우룡, 정창업, 정춘풍, 장자백 등 후기 8명창들은 전기 8명창들의 음악적 업적을 계승하고 이를 다듬어 다양한 더늠을 창출했다. 이 시기에 박유전에 의해 서민적인 감성에 충실한 서편제 소리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판소리는 더욱 다양하고 강한 흥행성을 띤 예술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판소리는 사사 계보와 전승 지역에 따라 섬진강을 기준으로 전라도 동쪽(곡성, 구례, 순창, 남원, 운봉 등지)을 동편제(東便制), 전라도 서쪽(광주, 나주, 화순, 보성, 목포 등지)을 서편제(西便制), 충청도와 경기도지역의 소리를 중고제(中高制)로 구분한다. 19세기 후반 판소리는 왕실에까지 침투하게 되었고, 고종과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많은 명창들이 벼슬을 받기도 했다.

19세기부터 판소리의 주요 청중은 양반으로 바뀌면서 이전의 서민의식은 상당히 수정되었다. 조선 고종 때의 판소리 작가 신재효는 중인 출신으로서 판소리 광대를 적극 후원하면서 양반들의 미의식에 걸맞은 판소리의 개작을 시도했는데, 이때 판소리 6마당의 사설집과 <성조가>, <광대가> 등의 창작 단가들이 만들어졌다.

인류 문화유산 걸작, 불멸의 판소리20세기는 ‘5명창 시대’로 일컬어진다. 박기홍, 전도성, 김창환, 이동백, 김창룡, 김채만, 정정렬 등이 당대의 명창이다. 이때는 국권 상실과 급격한 서구화의 충격으로 판소리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1902년 기생과 광대 등의 단체인 협률사가 만들어지면서 판소리는 극적 요소가 강한 창극으로 변신했다.

또한 유성기의 출현으로 판소리의 향수 방식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본래 광대는 남자들이 하던 것이었는데 신재효의 제자 진채선이 최초의 여창이 된 후 허금파, 강소춘, 이화중선, 박녹주 등 여창이 다수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으로 판소리의 소리와 발림 등이 여성화되기도 했다.

5명창의 뒤를 이어 장판개, 김정문, 공창식, 박중근, 임방울, 김연수, 이화중선, 박녹주, 김여란, 강도근, 박초월, 김소희, 박봉술, 정권진, 정광수, 박동진, 한승호, 오정숙, 성우향, 성창순, 조상현, 최승희, 송순섭 같은 명창이 나왔다.

광복 이후 판소리는 여성국극단의 등장으로 한때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으나 판소리 명창들이 창극에 참여하면서 점점 쇠퇴하게 된다. 몰락의 위기에 놓였던 판소리는 1980년대 이후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함께 새로이 조명되면서 그 뛰어나 음악성으로 갈채를 받고 있으며 2003년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다. 이렇듯 소중한 문화자산인 판소리의 미래는 판소리가 성장해 온 역사에서 읽어낼 수 있다.

역대 명창들은 경드름, 추천목, 호걸제 등 자기만의 독특한 더늠들을 창작하여 보탬으로써 판소리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였다. 가왕 송흥록의 동생인 송광록의 손자이며 송우룡의 아들인 송만갑(1866〜1939)은 서편제 명창 정창업의 소리에 감복하여 송씨 집안의 소리에 서편제의 발랄하고 구성진 요소를 가미하고 경기도 향토 음악제인 경드름을 즐겨 부르는 등 다양한 음악적 변화를 시도하여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판소리를 만들어 동편제 소리를 진수성찬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송씨 가문의 법통을 말살하려는 패려자손’이라는 지탄을 받았으며 동편제 소리를 통속화시켰다는 비난을 받았으나 대중들에게는 갈채를 받았다. “점방 보는 사람이 어찌 모본단(模本緞)만 가지고 장사를 하겠느냐?”는 그의 말은 “소리꾼은 포목상과 같아서 비단을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비단을 주고, 무명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무명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은 소리꾼들의 선구적인 노력은 그치지 않았으니 광복을 전후해서는 박동실의 <열사가>가 창작되었다. 우리 민중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과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표현한 것으로 <이준 선생 열사가> <안중근 열사가> <윤봉길 열사가> <유관순 열사가> 등이 있다.

박동진은 1969년에 〈판소리 예수전〉을 공연하였으며, 1973년 자신이 창작한 〈충무공 이순신전〉을 발표하였다. 임진택은 1985년에 〈똥바다〉를 발표하였으며, 〈오적〉과 〈소리 내력〉을 판소리로 불렀다. 기존의 사설에 곡을 붙이는 작업에 머무르지 않고 1990년에는 자신이 직접 작사·작곡한 〈오월 광주〉를 발표하였다. 이들의 공연에 청중들의 갈채가 쏟아진 것은 사설이 담고 있는 현실적 문제의식에 대한 공감에 바탕한 것으로 판소리가 당대의 절박한 문제를 담아내면서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예술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을 살고, 미래를 열어갈 살아 있는 예술

프랑스에서 판소리 한류를 불러일으킨 소리꾼 이자람은 독일 극작가 브레히트 원작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판소리 <억척가>로 탈바꿈시켜 중국 삼국 시대를 배경으로 억척스런 여인 김순종의 인생역정을 담아내며 전쟁이란 극한의 상황 속에 놓인 인간군상의 행태를 판소리 특유의 풍자와 해학으로 그려냈다.

한자어와 한문고사 대신 오늘날의 관객과 함께 호흡하고 함께 생동하기 위해 오늘의 말을 찾고, 동서고금의 악기로 극의 다양한 상황과 관계를 표현하는 음악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젊은 소리꾼들의 노력은 판소리의 미래를 개척하는 매우 값진 걸음이라 할 것이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명제를 지키려면 판소리의 전통을 보존하는 당연한 노력과 아울러 시대와 청중의 변화에 주목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관객의 울음과 웃음을 담아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시대와 소통하고 대중과 공감함으로써 판소리 저변을 널리 확대한다면 다시 판소리 전성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대동문화 84호 [2014 9,10월호]

김동현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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