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다. 혹은 이름을 붙이려고, 또는 존재 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예술가 또한 장르별 표현 방식을 통해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사유의 틀을 나름의 깜냥으로 표현한다. 한지 작가에서 금속공예 작가로, 구상에서 비구상으로 소재와 장르를 넘나들며 오브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최재창 금속공예가를 만났다.

전통 오방색과 차가운 금속이 만나서…

전시실 입구 좌측 벽면에 걸린 작품은 무등산 억새밭에 내리는 첫눈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한지와 볏짚을 소재로 탄생시킨 80년대 이 작품은 시립미술관에서 소장하기로 했다며 특별한 애정을 표현한다.

“주인을 잘 만나 다행이에요. 작품이 커서 개인이 소장하기는 부담스러운데 미술관에 소장하기로 해서 기쁘지요”

유배 생활처럼 시골에서 살며 작업하는 일이 좋다는 최재창 작가에게 한지를 떠나 금속공예에 접어든 계기를 물었다.

“80년 말까지 한지 작업을 했지요. 하지만 한지의 대가인 최종섭 선배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고 할까요? 한지로는 내가 끼어들 겨를이 없어요. 그래서 한지를 접어야겠다고 마음먹고 다른 사람이 쓰지 않는 오브제를 사용하기로 마음먹고 금속을 시작했지요. 아시다시피 광주에는 구상작가들이 엄청나게 힘이 세지요. 미술판을 꽉 잡고 있어서 광주에서 추상을 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더구나 이쪽은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소년처럼 맑게 웃으며 운을 뗀다. 금속 성질을 공부하기 위해 그는 87년도 광주대학교에 들어가서 ‘금속공예’의 성질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동판을 다루기 위해서는 기본공부가 필요했기 때문이란다. 그곳에서 동판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배우고, 홍대에 진학해서 그림 공부를 이어나갔다.

한지에서 금속으로 소재를 바꾸자 ‘이단자’라고 부르는 이도 있었단다. 그도 그럴 것이 공예도 하고 서양화도 하니, 그러려니 했지만 금속공예를 선택한 것은 금속과 한지를 오브제하기 위함이었지, 공예 작가가 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예술은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진솔한 작품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공예를 선택한 그의 행보에 이단자라 명명하니 서운할 수밖에….

그는 공예를 하기 전에도 다양한 소재와 장르를 통해 창작의 폭을 넓혀가고 있었지만 요즘은 전통과 현대의 만남을 ‘청실홍실’ 작업으로 표현하고 있다. 최재창의 작품에 나타나는 청색과 홍색의 이미지는 우리 조상들의 정신세계에 깃들어 있는 음(陰)과 양(陽)을 토대로 한 음양오행의 다섯 가지 방위색, 곧 오방색을 토대로 하고 있다.

즉 작가의 ‘청실홍실’ 작업은 전통의 사상과 현대 금속공예와의 만남이라 하겠다. 작가는 전통에서 건져 올린 청과 홍색을 동판위에 음과 양의 결합으로, 또는 청색과 홍색으로 조화 내지는 신랑과 신부의 만남으로, 전통과 현대를 오브제하고 있는 것이리라.

전통 오방색과 차가운 금속이 만나서…

이 작업에 매진한 지 벌써 15년째다. 그가 표현하려는 청실홍실 작품은 음양오행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의 정신세계를 현대 금속에 접목한 ‘청실홍실’ 작업은 올해 서울(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전시한 바 있다.

그 작품은 2013년 중반부터 시작한 작업이다. 이미 200매 이상을 작업했고, 그 중 70매를 연결하여 300호 크기의 작품으로 전시를 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청실홍실’ 작업은 1,000명의 얼굴을 동판이 새길 계획이란다. 지금까지 370매 작업하다가 중지했다.

“제자들 천 명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까 해서 작업을 시작했는데, 370명의 얼굴 밖에 안 떠올랐어요. 십년을 계획하면 가능할 것이라 믿어요. 제가 천의 얼굴을 계획한 것은 고운 시인의 ‘만인보’ 즉 만 개의 인간상을 집대성 한데서 힌트를 얻었지요.”

대동고등학교에서 37년 동안의 가르쳤던 제자들의 얼굴을 상기하면 분명 천의 얼굴은 작품화할 수 있다는 마음을 먹고 매진하고 있다. 앞으로 8년이면 가능하겠다는 의지로 날마다 금속판을 두들기고 있다.

동판 작품에는 청색 홍색 외에도 푸르스름한 빛이 돈다. 이 색깔은 천년이 지나도 변치 않고, 시간이 갈수록 자기 몸을 방어하기 위해 품어내는 푸르스름한 빛은 천 년이 지나도 이 느낌 모양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화공약품에 의해 착색이 된 푸르스름한 색은 동판이 약품과 닿아서 내는 자연스런 빛깔이다. 청동색의 자태에 매료되어 그는 오늘도 공구를 두들기기를 즐긴다.

영원토록 변치 않는 인간 본질 탐구

“불이 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내 작품 동판의 특징입니다. 적어도 동판은 천 도 이상에서 녹아 없어지니까.”

소년처럼 해맑은 웃음으로 작품 만들기에 열정을 쏟던 그가 손을 놓고 멍하니 있던 때도 있었다. 4년 전 사랑하는 아내를 폐암으로 떠나보내고, 살아가는 의미를 못 느낄 때가 있었다. 허무함과 우울증에 시달려 밖에 나가지도 않고 집에만 묻혀 살았다. 그러다 지인들의 조언으로 이것저것 기웃거리다 찾아낸 돌파구가 하모니카였다.

“암흑 같은 무력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다가 가장 쉽게 다룰 수 있을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하모니카를 생각했어요.”

시골에서 순박한 어르신들과 생활을 하면서 세월을 잊고, 작업에만 몰두하다 주1회 하모니카 배우러 광주로 나가는 일 외엔 작업실에서 드로잉에 몰두한다. 벽에 걸린 청동 작품들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작품화했단다. 동판에 청색과 홍색을 입혀 나름대로 작품의 세계를 넓혀가고 있는 것은 추상작가로는 살아남기 위해서라고 너스레를 떤다.

전시실에 걸려있는 작품 하나하나를 설명하면서 추상화라고 어렵게 보지 말란다. 작품의 의미는 독자가 부여하면서 이해하면 되니까.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독자의 몫이 된다. 동판에 한 땀 한 땀 드로잉된 청동색은 동판자체에서 약품과 화합해서 나온 색이라 변하지 않고 그림은 천년이 지나도 그 느낌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단다.

재미있는 에피소드인데 “광주에 그림을 많이 소장하고 계신 분 집에 불이 나서 유명작가들 작품이 다 불에 타고 없어졌는데 내 작품만 남았답니다.” 그러니 천년을 갈 수 있는 작품이지 않느냐고 한다.

이 일은 건강이 우선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건강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잠자는 시간 외에는 작업에 몰두한다. 이전에는 술로 피로를 풀었는데, 지금은 동반자 하모니카가 있어서 술을 끊었다. 그리고 가끔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잠깐씩 시간을 보낸다. 동네에서 제일 젊은 이장이 79세니까 그는 노장 축에도 못 낀다나….

그는 광주의 비구상 작가들이 주를 이룬 ‘에뽀끄 현대작가회’(64년 창립)에 72년부터 활동하고 있다. 현재 ‘에뽀끄’ 활동은 비엔날레가 열리지 않는 해에 국제전을 연다. 2007년 1회로 국제현대미술광주아트비전 ‘에뽀끄 전시회’를 시작하였는데 지원하는 데가 없어 금호, 신세계 등지를 찾아다니면서 그림으로 기금을 마련하여 2년마다 국제전을 이어가고 있다.

최재창, 그에게 천의 얼굴을 계획하고 있는 목적을 물었더니 언젠가는 모르지만 작품을 모아둘 장소가 마련된다면 그곳을 지킬, 혹은 채울 준비를 위해서란다. 그래서 그림을 팔지 않고 하나씩 쌓아둔다. 그림을 팔면 좋은 것은 다 나가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해 연구 소장품으로 모아둔 작품은 현재 500여 점 정도 된다.

웃음이 해맑은 72세의 금속공예가 최재창, 그가 천의 얼굴을 동판에 새기기 위해 잃었던 웃음과 열정을 하모니카로 담금질해가며 벽면을 가득 채울 그날을 연상해 본다. 그가 새겨낼 작품 속에서 만 명의 평범한 우리 시대 인물들은 천 년 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

작업실 전남 화순군 도곡면 평덕리 덕곡덕산길 19

대동문화 89호 [2015 7,8월호]

한영숙 편집위원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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