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아귀에서 모래가 빠져나가듯이 시간이 우수수 빠져나간다. 아침에 이부자리에 머리칼이 빠져있는 것처럼 되돌아보면 지나간 시간이 애처롭다.

이성부(1942. 1. 22.~2012. 2. 28.) 시인의 1주기에 맞춰 시비가 건립됐다. 광주에서 태어난 시인이 문학에의 꿈이 영글었던, 광주고등학교 교정에서 지난 6월 23일 ‘무등산’ 시비 제막식이 열린 것이다. 동료 문인들과 유가족들이 참여했다.

우리는 아름다운 소풍을 했습니다

동기였던 유수택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우리는 보편화된 세상을 보았고, 일반적 소풍을 했지만 이성부 시인은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시의 세계에서 아름다운 소풍을 했습니다.”라고 시적으로 시인을 추억했다. ‘보편화된 세상’과 ‘일반적 소풍’이란 그 시대적 상황을 지내온 모든 사람들의 삶의 평범성을 말할 것이고, ‘아름다운 소풍’이란 그 역사적 삶의 문제에 시적 상상력의 촉수를 들이대고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직시한 서정시를 썼던 시인의 삶을 일괄한 것이다.

시비 제막식을 준비한 범대순ㆍ손광은ㆍ나종영 씨 등 광주 문단의 원로와 중진문인, 화가 황영성(광주시립미술관장)ㆍ강연균 씨 등 예술계 인사, 시인의 광주고등학교 9회 동문 및 졸업생, 재학생, 유가족 등이 참여했다.

인사말에서 광주고 김동근 교장과 손광은 시인의 인사말, 재학생의 「무등산」시 낭송 등이 이어졌다. 절친한 동기생이었던 소설가 문순태 씨가 ‘이승의 산행을 끝낸 성부에게’라는 추도사를 낭독했다.

유가족인 미망인 한수아 씨는 이성부 시인이 서울대 병원 병상에서 썼던 시 「낭개머리 바위에 앉아」의 창작 배경을 설명하고 낭독했다. 이 시가 시인의 마지막 유작이었다.

기쁨에 말이 없고,/슬픔과 노여움에도 쉽게 저를 드러내지 않아,/길게 돌아누워 등을 돌리기만 하는 산./태어나면서 이미 위대한 죽음이었던 산./무슨 가슴 큰 역사를 그 안에 담고 있어/저리도 무겁고 깊게 잠겨 있느냐./저 산이 입을 열어 말할 날이/이제 이를 것이고,/저 산이 몸을 일으켜 나아갈 날이/이제 또한 가까이 오지 않았느냐./저 산에는/항상 어디 한구석 비어 있는 곳이 있어,/내 서울을 떠나기만 하면/그곳이 나를 반가이 맞아줄 것만 같다. -「무등산」 -

‘태어나면서 이미 죽음이었던 위대한 산’이 무등산이었다는 시인의 시 속에서 광주의 고난과 시인의 죄의식이 중첩되어 있다. 시인은 무등산과 광주의 시인이었다.

문순태 소설가는 「무등산을 닮은 이성부」라는 글에서 ‘이성부 시인이 늘 무등산을 찾았던 것은 지친 삶에 잠시 쉼표를 찍고, 바쁜 시간의 축적 속에서 잊고 살아왔던 것들을 다시 추스르고 나서야 균형을 갖춘 평화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로 보고, 늘 새롭게 출발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라고 쓰고 있다. 무등산은 이성부에게 ‘고유명사적 존재가 아니라 어머니, 고향, 청춘, 슬픔, 사랑, 추억 내일과 같은 보통명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썼다.

그리고 이성부 시인이 과묵하고 듬직하고 차별하지 않는 넉넉함, 그려면서도 앙칼스런 오기로 시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던 무등산을 닮았다고 말하고 있다. ‘무등산을 닮은 시인’이라는 평가보다 더 훌륭한 찬사는 없을 것이다.

넉넉한 무등산을 닮은 시인

이성부(李盛夫) 시인은 1942년 광주 동구 대인동에서 태어났다. 광주수창초등학교와 광주사범병설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한국 전쟁 시절 온식구가 무등산 ‘꼬두메’와 잣고개 너머 ‘신촌’으로 피난하게 됐는데, 이때 무등산은 그의 시적 밑바탕에 고여 있게 됐다.

초등학교 시절엔 고모의 책들이나 친구들의 집에서 빌린 세계 명작 전집을 통독했다. 광주사범병설중학교 시절 문예반 동인지 『녹원』을 발간하고, 학생잡지 『학원』 등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학에 재능을 나타내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문예반 지도교사 송규호 선생과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이이화, 강홍기 선배를 만나 문예반 할동을 하게 된다. 이때 문순태와, 문예반 선배인 박성룡․박봉우․윤삼하․정현웅․강태열 시인 등과 만나기도 했다.

1959년 고교 문예작품 현상모집에 여러 차례 당선하고, 광주의 문우들과 『순문학』동인회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1960년에는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시로 당선됐다.

경희대학교 국문과에 진학한 후에는 조병화․황순원․김광섭 시인의 지도를 받았다. 1962년 『현대문학』에 김현승 시인 추천으로 등단하게 된다. 또 1967년 동아일본 신춘문예에 「우리들의 양식」이 당선되었다. 1968년 계간지 《창작과 비평》과 ‘68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전라도」 연작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전라도적 향토성을 기반에 두고 사회 현실을 비판하는 시세계를 확립해나갔다.

노인은 영산강을 삽으로 퍼올린다

1969년 300부 한정 첫 시집 <이성부 시집>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백제행>(74), <전야>(77), <평야>(82) 등의 시집이 발행되었다.

노인은 삽으로/영산강을 퍼올린다 바닥이 보일 때까지/머지않아 그대 눈물의 뿌리가 보일 때까지/노인은 다만/성난 사람을 혼자서 퍼올린다/이제는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삶을 어떻게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노인은 끝끝내 영산강을 퍼올린다 가슴에다/불은 짊어지고 있는데/아직도 논바닥은 붉게 타는데/바보같이 바보같이 노인은 바보같이 -「무등산」 7-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은 후 작품을 발표하지 못했다. 노골적인 독재정권의 광주시민들에 대한 학살에 충격을 받고 슬픔을 삭이는 시기를 보낸다. 주로 산행을 하면서 내면의 죄의식에 대면하고 좀더 큰 역사적 시각으로 시를 써내려가기를 원했다. 1989년 발행한 시집 <빈산 뒤에 두고>부터 이런 산 사랑에 대한 관심이 비롯됐다. <야간산행>의 연작 산행시 등에서 초극적인 시어로 남성적인 시세계를 펼쳤다.

이성부는 출판사에 다니다, 69년 봄 한국일보에 입사 후<일간 스포츠> 부국장대우 문화부장에 이르기까지 근 30여 년을 근무했다. 그러다가 정년을 지낸 후에는 산에서 살다시피 했다.

2001년 등단 40년을 넘긴 시인이 백두대간 종주를 실행하기 위해 지리산을 오르면서 집필한 시편들을 모아 ‘내가 걷는 백두대간’ 연작시집인 <지리산>을 발행했다. 산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과 자기 성찰이 빛나면서 시대적 반성과 문학적 반성이 빛나는 원숙한 시세계를 펼쳤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05), <도둑산길>(10), 산문집 <산길>(02)과 같은 저작들이 그 산물이다. 자연의 숨결을 발견하고 구도의 길을 찾았다. 한국문학작가상(77), 대산문학상(01), 편운문학상(05), 가천환경문학상(07) 등을 수상했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어디 뻘밭 구석이거나/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흔들어 깨우면/눈 비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봄」-

이성부 시인은 생애 마지막 7년 동안 암 투병을 해왔다. 암투병을 하면서도, 시작과 산행은 일상이었다. 북한산을 한 달에 세 번 이상씩 오르내릴 정도였다고 한다. 25년여 동안 북한산 등반만 1,000여 회의 기록을 갖고 있었다. 등반 후 반드시 하산주로 막걸리를 들이켰다.

이성부는 마지막 병상에서도 집필 의욕 불태웠다고 한다. 그러나 병마는 더디게 더디게 시인을 쓰러뜨렸다. 그리고 시인에게는 더디게 더디게 시간이 갔을 것이지만, 남은 우리들에게서 시간은 아주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어디 뻘밭 구석이거나/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흔들어 깨우면/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너를 보면 눈부셔/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가까스로 두 팔 벌려 껴안아 보는/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봄」 전문-

시인은 주로 사회적인 삶과 역사적인 삶이 우리 일상의 평범한 사람들과 맺고 있는 그 산맥과 같은 연결고리를 짚어냈다. 서정의 신선함과 상상력의 내밀함으로 그것들을 빚어냈다. 현실의 부조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애달픈 자아의 부끄러움에도 정면으로 대응했다. 무엇보다 향토적 정서와, 민중적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당당함이 있는 시를 써냈다. 그래서 그는 무등산을 닮은 시인이기도 하고, ‘벼’를 닮은 시인이기도 하다. 우리도 서로 몸을 묶을 누군가를 위해 산다.

대동문화 77호 [2013 7,8월호]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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