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사헌부(司憲府)의 관원들이 매일 한 번씩 다시청(茶時廳)에 모여서 차(茶)를 나눠 마시면서 서로의 불화를 화해하고 잘잘못, 부정, 불법을 서로 반성, 고발하는 자체 정화의 시간을 가졌다.

홍진(紅塵)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生涯) 어떠한고/옛 사람 풍류(風流)를 미칠가 못 미칠가/천지간(天地間) 남자(男子) 몸이 날만한 이 많건마는/산림(山林)에 묻혀 있어 지락(至樂)을 모를 것인가/수간모옥(數間茅屋)을 벽계수(碧溪水) 앞에 두고/송죽(松竹) 울울리(鬱鬱裏)에 풍월주인(風月主人) 되었어라.

자연의 주인이 되어 사는 사람의 지극한 즐거움을 노래했다. 옛 사람 풍류를 알지는 못하지만 흉내는 낼 줄 알아야 하리라. 조선시대 최초의 가사문학 작품인 ‘상춘곡(賞春曲)’의 주인은 그렇게 말한다.

그대 풍월주인이 되어라

불우헌 정극인 동상. 호를 다헌 다각이라고 하여 차를 즐겼다.

‘상춘곡’의 저자인 불우헌(不優軒) 정극인(丁克仁; 1401~1481) 선생의 차문화 흔적을 찾아 전북 정읍 칠보면 무성리의 무성서원을 찾은 날은 상춘할 봄철이 아니라 초여름이었다. 불우헌은 향리인 전라북도 태인에 은거해 자신의 만년인 성종 연간의 낙향지 태인의 봄경치를 그렇게 가사로 읊었다.

무성서원(武城書院)이 있는 정읍 칠보, 태인, 산내, 산외 일대는 호남 선비 문화의 중심지로 신라시대 때부터 ‘태산(泰山)’으로 불렸다. 통일 신라 시기에 유학의 태두 고운 최치원이 태산군수로 부임한 이래 선비 유풍이 계속되어 조선시대 신잠,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 등의 선비들이 줄을 잇게 되었고, 이 7명의 선비들은 무성서원에 함께 배향되어 있다.

이곳을 ‘태산 선비 문화권’이라고 부른다. 이곳 문화유산 답사에는 꼭 피향정과 무성서원에 들러야 한다. 그리고 무성서원 주변은 상춘곡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송정을 비롯 후송정, 한정 등 정자 10여 개와 필양사, 송산사, 시산사, 영모당 등의 사당, 무성리 석불입상, 무성리 삼층석탑 등의 문화재가 즐비하다.

이웃들아 산수 구경 가보자꾸나

다아(茶牙)의 발걸음은 정극인의 동상 곁에 있는 태산 선비문화 사료관과 사료관 곁으로 송정근린공원 정상의 상춘대를 올라, 무성서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무성리 마을 뒷산에 자리한 영모재(永慕齋)와 정극인의 묘소에도 올랐다.

이바 이웃들아, 산수(山水) 구경 가자스라. 답청(踏靑)이란 오늘 하고, 욕기(浴沂)는 내일(來日)하세. 아침에 채산(採山)하고, 낮에는 조수(釣水)하세. 갓 괴어 익은 술을 갈건(葛巾)으로 바퉈 놓고, 꽃나무 가지 꺾어, 수놓고 먹으리라. (…) 미음완보(微吟緩步)하여 시냇가에 혼자 앉아, 명사(明沙) 좋은 물에 잔 씻어 부어 들고, 청류(淸流)를 굽어보니, 떠오느니 도화(桃花)로다. 무릉(武陵)이 가깝도다.

무릉도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둘레길처럼 조성해놓은 상춘곡 공원은 미음완보하니 녹음이 마음을 푸르게 물들였다.

태산선비문화사료관에서 조선시대 최초의 가사 작품인 상춘곡의 창작 배경, 보물 제1181호로 지정된 ‘태인 고현동 향약’에 대한 설명을 읽는다. 그리고 위압적이지 않은 소박함을 지닌 무성서원을 둘러본다.

정극인은 광주 두모포리에서 태어났으나 벼슬을 버리고 태인으로 낙향해 집의 이름을 불우헌이라고 했다. 처가가 태인인 까닭이었다. 1429년 생원이 된 후 1437년 세종이 흥천사라는 절을 중건하기 위해 토목공사를 하자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귀양을 갔다. 그 뒤 풀려나 태인에 내려갔고, 이때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다. 임진왜란 전후에 시작해 1977년에 이르기까지 약 400년 동안 이어져온 향약 자료로 관련 연구의 중요한 자료다.

불우헌은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즉위하자 전주부교수참진사로 있다가 사임하고 태인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후 다시 출사하여 성균관주부, 종학박사, 사헌부감찰, 사간원헌납 등으로 벼슬을 했다.

공명도 부귀도 나는 싫다오

1470년(성종 1) 관직을 사양하고 귀향했다. 1472년 3품산관의 벼슬이 내려지자 감격해 ‘불우헌가(不憂軒歌)’, ‘불우헌곡(不憂軒曲)’을 지어 송축했다. 1481(성종 12)년 81세의 나이로 죽었다.

공명(功名)도 날 꺼리고, 부귀(富貴)도 날 꺼리니, 청풍명월(淸風明月) 외에 어떤 벗이 있을까. 단표누항(簞瓢陋巷)에 허튼 혜음 아니 하네. 아모타, 백년행락(百年行樂)이 이만한들 어떠하리.

정극인의 호는 불우헌 외에도 다헌(茶軒), 또는 다각(茶角)이 쓰여 차를 즐겼음을 알 수 있다. 공명도 부귀도 꺼리고 청풍명월을 벗 삼아 백년 동안 즐거움을 누리려던 불우헌에게 차의 즐거움도 함께했다. 문집인 ‘불우헌집’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한다.

눈 녹인 물로 차 달이니 푸른 구름이 일어나는 것 같고/창에 비친 매화는 거문고와 어울리네/새하얀 눈바다 보면 시가 절로 읊어지니/흥이 높아지니 어디 가서 더 좋은 것이 있다고 말하리(雪水烹茶漲綠雲/梅牕日映對桐君/光搖銀海堪吟賞/乘興何須訪戴云)

눈을 녹여서 차를 달여 마시고, 거문고와 매화와 시가 있는 고아한 선비가 누리는 차 생활의 즐거움이다. 이 흥겨움 외에 어디 가서 더 좋은 것이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또 <불우헌집>에는 그가 사헌부의 감찰로 있었던 때, ‘다시(茶時)’를 가졌다는 기록이 전한다. 감찰이 25명, 지평과 대사헌이 있었으며, 가장 나이가 오래된 사람이 방주가 되어 ‘다시’를 열었다는 기록이다.

공정한 판결을 위한 차회 풍습 기록

관청에서도 차 마시는 풍습이 있어 사헌부에서는 날마다 한 번씩 차를 마시는 다시를 가져 사안의 공정한 판결을 가했다는 기록의 하나다.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연려실기술별집(燃黎室記述別集)>, <미암일기(眉巖日記)>, <지봉유설>에도 다시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사헌부(司憲府)의 관원들이 매일 한 번씩 다시청(茶時廳)에 모여서 차(茶)를 나눠 마시면서 서로의 불화를 화해하고 잘잘못, 부정, 불법을 서로 반성, 고발하는 자체 정화의 시간을 가졌던 기록을 적은 것이다.

불교에서 청정한 승가공동체를 굳건히 유지하기 위해서 보름마다 대중 앞에서 참회하는 ‘포살’과 스님들이 안거가 끝난 후 대중에게 자신의 허물을 묻는 ‘자자’의 전통이 있다.

다시든, 포살이든, 자자든 차가 세상사 먼지를 먼지에 묻히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마음을 가다듬는 정화수였던 것은 분명하다. 공명도 부귀로 그를 즐겁게 할 수 없으나 청풍명월을 가져버린 처사의 마음이야말로 백년행락(百年行樂)의 주인공인 것이다. 그리고 그 욕심 버림의 ‘정화수’는 바로 차였던 것이다.

그러니 벗님네야! 조흔 물에 잔 씻어 차를 부어 들고 청류를 굽어보니 도화가 떠온다. 그곳이 무릉이로다. 가자꾸나! 자연으로 가자꾸나!

대동문화 89호 2015년 7월 8월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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