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정(酩酊)’이란 술이 곤드레만드레 된 상태이다.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1897~1961) 선생이 1953년 3월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한 수필집이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인데 이 수필집 중에 <백주에 소를 타고>는 수주의 가장 유명한 수필이 되었다.

수주 변영로가 공초 오상순(空超 吳相淳), 성재 이관구(誠齋 李寬求), 횡보 염상섭(橫步 廉想涉) 등과 함께 당시 동아일보사의 편집국장이었던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에게 원고료를 가불하여 술을 마신 이야기이다.

우리는 어느덧 언덕 아래 소나무 그루에 소 몇 필이 매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번에는 누구의 발언이거나 제의였던지 이제 와서 기억이 미상하나 우리는 소를 잡아타자는 데 일치하였다. 옛날에 영척(寗戚)이가 소를 탔다고 하지만 그까진 영척이란 놈이 다 무엇이냐. 그 따윗 것도 소를 탔는데 우린들 못 탈 배 어디 있느냐는 것이 곧 논리이자 동시에 성세(聲勢)이었다.

하여간 우리는 몸에 일사 불착한 상태로 그 소들을 잡아타고 유유히 비탈길을 내리고 똘물(소나기로 해서 갑자기 생겼던)을 건너고 공자(孔子) 모신 성균관을 지나서 큰 거리까지 진출하였다가 큰 봉변 끝에 장도(壯圖 ─ 시중까지 오려던)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곤드레만드레 산 인생 40년을 ‘명정40년’이라고 규정하고 기지, 해학, 호쾌한 유머가 넘쳐나는 글을 거침없이 썼던 이가 수주 변영로이다. 수주의 수필에 일관되게 흐르던 호쾌한 유머와 기질은 술로 달래야 했던 식민지 시절 지식인의 울분에 다름 아니었다.

시인, 수필가, 영문학자, 영시 창작 문학가로 활동

수주 변영로 시인의 삶과 문학 세계에 대한 계승은 어린 시절을 보내고 묘지가 있는 경기도 부천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2005년부터 한국작가회의 부천지부 주관으로 제1회 수주문학제가 개최되었으며, 수주문학상 시상과 청소년 시 백일장 등의 프로그램을 확대시켜 지역 대표 문학 축제로 발돋움했다. 부천시에는 ‘수주로’가 있고 중앙공원에 ‘시비’와 ‘동상’이 있다. 그러나 수주 변영로에 대한 연구는 그 업적에 비해 소루하다. 연구자들이 많지 않고, 변영로의 민족 문학적 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수주 변영로는 1920년대 초 《폐허》 동인으로서 한국의 초기 현대시를 완성하는 데에 기여했다. 그리고 <명정사십년>과 <수주수상록> 등의 수필집을 통해 한국 현대 수필을 발전시킨 소설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1918년 ≪청춘≫에 영시 ‘코스모스(Cosmos)’를 발표하면서 시작 활동을 하여 훗날 대한공론사 이사장에 취임, 영문 일간지《Korean Republic》주재, 발간하며 영시의 번역과 창작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던 문학가였다. 그리고 평론과 외국문학 번역 그리고 영문학자이자 언론인으로서도 굵직한 업적을 남긴 문학인이었다.

독립선언서 번역 세계에 알리다

수주 변영로는 1898년 5월 9일 서울 맹현(孟峴, 지금의 종로구 가회동)에서 아버지 변정상(卞鼎相)과 어머니 진주 강씨 사이에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1904년 서울 재동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그 뒤 계동보통학교로 전학하였고, 1910년에 사립 중앙학교(중앙고보의 전신)에 입학하지만 자퇴했다. 15세가 되던 1912년에 평창 이(李)씨 흥순(興順)과 결혼한 후, 1915년에 중앙기독교 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학,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졸업하고 곧바로 중앙기독교 청년회학교 영어반 교사로 취임한다. 1918년에는 중앙고보 영어 교사로 부임하며, 이때 《청춘》에 영시 ‘Cosmos’를 발표하여 천재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게 된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YMCA에서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 조선의 독립선언 취지와 우리 겨레의 울분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으며, 1920년 《폐허(廢墟)》의 동인으로 참여했다. 이어 《동아일보》에 ‘한국 근대 미술 비평의 효시’라 할 <동양화론(東洋畵論)>을 발표하기도 했다.

1921년에는 《장미촌(薔薇村)》 동인으로 참여했고, 《신민공론(新民公論)》주필을 맡는다. 이후 《폐허》, 《신천지(新天地)》, 《조선일보》, 《신생활(新生活)》, 《동명(東明)》, 《개벽》, 《동아일보》 등에 많은 시와 평론을 발표했고 1923년에는 이화여전(梨花女專) 강사로 부임한다.

1924년 첫시집 <조선의 마음>을 평문관에서 발행하였고, 1925년 《조선일보》에 여러 시와 산문을 발표하면서 이때부터 그의 아호 ‘수주(樹州)’를 쓰기 시작했다. 1926년 <조선시인선집>에 그의 시 <하일정취>, <어느 날>이 수록되었으며, 1930년에는 《시문학》 2호에 <고운 산길>을 발표, 동인으로 참여해 ‘시문학파’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1931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 대학에서 수학했고, 귀국하여 1933년 동아일보사에 입사, 월간《신가정》의 주간을 맡는다.

1934년 부인과 사별한 후 이듬해에 양창희(梁昌姬)와 재혼했다. 1936년 《신가정》표지에 손기정의 다리만 게재한 사건이 빌미가 되어 《동아일보》를 떠나게 된다. 1939년에는 서울에서 1925년에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107일 간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부임하였고, 1948년에는 영문시집 《Grove of Azelea(진달래 동산)》, 그리고 이하윤과 함께 <영시선집>을 출간했다.

1949년 서울신문사 이사로 취임하였고 한국동란 중이던 1950년에는 진해 해군사관학교 영어 교관으로 부임하여 잠시 활동했으며 1953년 휴전 후 대한공론사 이사장(성균관 대학교 교수 겸직)에 취임, 영문 일간지 <Korean Republic>을 주재, 발간하면서 이때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조직에 참여 초대위원장을 맡았다. 이 해에 수필집 <명정 40년》을 출간했으며 문교부 발행 <중학국어>에 그의 시 <논개>가 수록된다. 이어 1954년에 수필집 <수주 수상록(樹州 隨想錄)>을 출간한다.

1955년 ‘선성 모욕’ 사건으로 성균관대학교 교수직에서 물러나지만, 비엔나 국제펜클럽 제27차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며 이 해에 두 번째 영시집 <Korean Odyssey>를 출간한다.

1959년에 <수주시문선(樹州詩文選)>을 출간했으며, 1961년 3월 14일 서울 종로구 신교동 자택에서 인후암으로 세상을 뜬다.

숭고한 민족적 양심과 자유 수호한 민족주의 시인

수주 변영로 시인은 일제 시기 시인의 민족의식을 표출한 시들과 문학 작품들을 남긴 대표적인 시인이었다. 시집 <조선의 마음>이 발간되던 때의 대표작은 시 ‘논개’이다. 또 광복 이후에도 선비적 절개와 지조를 고수하려는 태도를 드러낸 ‘실제(失題)’와 ‘사벽송(四壁頌)’ 등 우국적 시를 주로 썼다.

수주는 기미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외국에 독립선언의 취지와 겨레의 울분을 알리는 역할을 했으며,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신가정》의 주간을 맡고 있던 1936년 그 잡지의 표지에 손기정의 다리만 게재하여 신문사를 떠나야 했고, 1925년 서울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의해 1939년 체포되어 107일간 옥고를 치루기도 한 인물이었다.

수주의 대표작은 1922년 4월 《신생활(新生活)》에 발표된 시 <논개>와 1924년에 출간한 그의 첫시집 《조선의 마음》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기(義妓)로 촉석루에서 왜장을 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한 ‘논개’를 노래한 시를 발표한 것만으로도 그의 민족의식이 어떠했던가를 알 수 있다.

‘조선마음’을 어디가 찾을까?/‘조선마음’을 어디가 찾을까?/굴 속을 엿볼까, 바다 밑을 뒤져볼까?/빽빽한 버들가지 틈을 헤쳐볼까?/아득한 하늘가나 바라다볼까?/아, ‘조선마음’을 어디 가서 찾아볼까?/‘조선마음’은 지향할 수 없는 마음, 설운 마음!

-「조선의 마음」-

1924년에 발간된 수주의 첫시집 <조선의 마음>의 주제이기도 한 이 시는 순수시적 전통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책임감과 민족적 정서를 표출했다. 이 시가 실린 수주의 시집 <조선의 마음>에는 28편의 시와 수상 8편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시화집은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발행과 동시에 곧 총독부에 의하여 압수되어 폐기 처분되었다. 그래서 친일 문학 연구자인 임종국 선생은 수주를 가리켜 윤동주와 더불어 ‘단 한편의 친일문장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작가’라 일컬었다.

수주는 시 <논개>와 첫시집 <조선의 마음>을 관통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수주는 민족혼을 노래한 시인이다. 시인은 시대의 절벽에 맞닥뜨려 자기 수호, 민족적인 지조와 양심, 지성과 자유를 수호하려는 비장한 각오로 시혼을 빛냈으며, 호방하고 호쾌한 수필로 시대의 양심을 지켜내려 했던 것이다. 그것이 「논개」에서의 ‘거룩한 분노’, ‘양귀비보다 더 붉은 양심’이었던 것이다.

대동문화 81호 [2014 3,4월호]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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