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면 우리는 T.S.엘리어트의 시 ‘황무지’를 떠올린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라일락은 죽은 땅에서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활기 없는 뿌리를 일깨운다. 겨울이 오히려 우리를 따뜻이 해 주었다.”(민음사, 황동규 역)

새로 움트는 생명과 가난과 혁명의 아우성은 한국의 4월을 잔인하게 만든다. 시인 신동엽의 ‘4월의 갈아엎는 달’이라는 시는 그래서 이렇게 외친다. ‘미치고 싶었다./4월이 오면/곰나루서 피 터진 동학의 함성./광화문서 목 터진 4월의 승리여.//강산을 덮어, 화창한/진달래는 피어나는데,/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이 균스러운 부패와 향락의 불야성 갈아엎었으면/갈아엎은 한강 안에다/보리를 뿌리면/비단처럼 물결칠, 아 푸른 보리밭.’

그래서 한국의 4월은 둘 중에 하나다. ‘부패와 향략의 불야성을 갈아엎어’야 할 달이거나, ‘푸른 보리밭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생명의 달이다. 갈아엎거나, 아니면 씨를 뿌리거나….

4월 오늘은 가는 봄을 애도하리니

4월 봄비를 맞으며 부여로 간다. 백제왕릉원과 국립부여박물관도 보고, 궁남지와 부소산 고란사와 낙화암에도 들렀다가, 부여읍의 신동엽 생가와 문학관에 가서 속절없이 사위는 봄을 애도한다. 생가는 신동엽이 자라고 신혼생활을 한 곳으로 신동엽의 유족인 아내 인병선, 아버지 신연순 등이 1985년 복원했으며, 2003년 유품과 함께 부여군에 기증했다.

이 부지 뒤쪽에 지난 2013년 문학관이 개관됐다. 문학관은 건축가 승효상이, 신동엽 시인의 흉상은 조각가 심정수가, 문학관 앞마당에 설치된 깃발처럼 휘날리는 설치 미술 작품은 임옥상이 제작한 것이다. 시인의 육필 원고 737점을 비롯해 편지와 사진, 책 등 모두 2,114점이 기증되어 전시되고 있다.

생가와 문학관을 들러보면서 시인의 부러운 기록벽과 함께 ‘짚풀생활사박물관’을 세운 아내 인병선의 남편에 대한 사랑, 부여군민들의 시인에 대한 자부심 등이 눈에 들어와 알알이 박혔다. 이 생가의 길 자체가 ‘신동엽길’이다. 그렇다. 시인의 시구처럼 ‘봄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눈짓, 우리들 가슴속에서 매일 움튼다.’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를 찢어라

문학관에서 <시인 신동엽> 평전을 사서 읽는다. 신동엽 시인은 이곳 부여에서 1930년 태어난다. 1남 5녀의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자란 탓인지 몸피도 작고 허약했다.

부여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사범학교에 가서는 <노자>, <장자>, 김소월, 정지용, 뚜르게네프 등을 읽었다. 1948년 사범학교 4학년으로 동맹 휴학에 가담해, 무단 장기 결석이라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1949년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가 전시연합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다, 1950년 12월 말에 국민방위군에 징집됐다.

1951년 2월 국민방위군 대구수용소를 빠져나와 대구 대전 등을 거쳐 병든 몸으로 귀향했다. 이때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생으로 게를 잡아먹었는데, 이때 디스토마에 감염되어 결국 나중에 목숨을 앗아간 빌미가 됐다.

부여에서 요양하다 대전으로 가서 다시 전시연합대학을 다녔는데, 이때 친구 구상회와 충남 일대 백제의 사적지와 동학농민전쟁의 자취를 답사해 이후 장편 서사시 「금강」의 시초가 될 기록을 남겼다.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상경해 고향 선배가 운영하던 헌책방에서 책방 일을 도왔는데 이때 이화여자고등학교 3학년 인병선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결국 둘은 평생의 반려가 된다. 신동엽 시의 모든 시적 모티브 중에서 가장 중요한 동력의 하나인 ‘사랑’의 밑거름이 이 만남 이후 계속됐다.

서울 육군본부에서 근무하다 입대 1년 만에 의가사 제대하고 그 겨울에 구상회, 노문, 이상비, 유옥준 등과 함께 《야화》라는 동인지를 준비했다. 1957년 28살에 농촌경제학자 인정식 선생의 외동딸 인병선과 부여에서 혼례를 올렸다. 신부는 많은 시가 식구들을 건사하기 위해 ‘이화양장점’을 차리기도 했다.

신동엽은 1959년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조선일보에 응모해 가작 입선했다. 이때 시 예심을 봤던 시인 박봉우와 절친한 문학적 동지가 되었다. 봄 상경하여 돈암동에 전세방을 얻었다. 「진달래 산천」 등을 발표했다. 소설가 하근찬을 만나 평생지기가 되었다. 4.19 혁명이 일어나자 「아사녀」가 실린 <학생혁명시집>을 만들어 출간했다.

32세 때인 1961년 명성여자고등학교 야간부 국어교사로 특채되어 이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재직하는데, 안정된 생활 속에서 대표작들이 연이어 발표됐다. 첫시집은 <아사녀>로 문학사에서 출간됐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네가 본 건, 먹구름/그걸 하늘로 알고/일생을 살아갔다.//네가 본 건, 지붕 덮은/쇠 항아리,/그걸 하늘로 알고/일생을 살아갔다.//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찢어라, 사람들아,//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1964년 서울, 부여, 목포 등을 거쳐 제주도를 여행했다. 36세 때인 1965년 한일협정비준 반대 문인 서명 운동에 참여했다. 「풍경」, 「그 가을」, 「나의 나」, 「너는 모르리라」, 「초가을」, 「4월은 갈아엎는 달」, 「껍데기는 가라」, 「아니오」를 발표하면서 시인의 목소리가 장중하고 커졌다. 김수영 시인은 신동엽의 「아니오」를 예로 들면서 “이 시에는 우리가 오늘날 참여시에서 바라는 최소한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1967년 12월에 모두 26장으로 된 4,800행의 대작 장편서사시 「금강」을 발표했다. 문단는 모두 놀랐다. 동학-3.1운동-4.19로 이어지는 역사적 위도와 4.19 이후의 민족의식이라는 경도 안에 ‘신하늬’와 ‘인진아’라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켜 공동체 한국의 역사와 미래를 도정했다.

밤 열한시 반/종로5가 네거리/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무거운 멜빵 새끼줄로 얽어맨/소년이, 나를 붙들고/길을 물었다./(…)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소년의 눈동자가/내 콧등 아래서 비에/젖고 있었다.//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운동환 벗어 들고/바삐바삐 지나가는 인파에/밀리면서 동대문을/물었다.//등에 짊어진/푸대자루 속에선/먼 길 여행한 고구마가/고구마끼리 얼굴을 맞비비며/비에 젖고,//노동으로 지친/내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비에 젖고 있었다.//나는/가로수 하나를 걷다/되돌아섰다.//그러나/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장편 서사시 「금강」의 후화(後話)-

신동엽의 「금강」은 4.19에서 멈춘 서사시가 아니었다. 이러질 모든 민족사적 시대의 문제점 앞에서 언제라도 불릴 예언의 시였다. 모든 자주, 평화의 열망이 분출하는 시대의 복판에서 누구라도 다시 외칠 시였다. 그것은 언제나 메아리쳐질 미래에 대한 잠언의 시였다.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39세 때인 1968년 장편서사시 <임진강>을 구상하고 문산 일대 임진강변을 답사했으나 이 구상은 완성되지 못했다. 1969년 간암 진단을 받아 서울 동선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부여읍 동남리 백마강 기슭(1970년), 단국대학교 서울캠퍼스(1990년), 부여초등학교(1999년), 전주교육대학교(2001년)에 신동엽의 시비가 세워졌다.

1975년 <신동엽 전집>, 1979년 시선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1988년 유고집 <꽃같이 그대 쓰러진>이 출간됐고, 1994년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기념 작품으로 가극 「금강」이 초연됐다. 신동엽 기념사업회가 정식 발족되고, <신동엽 시전집>이 발간됐다. 1982년부터 창작과 비평사의 ‘신동엽 창작 기금’이 마련됐다.

1960년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시대에 신동엽은 역사와 현실에서 문학 정신의 실천적 힘을 얻어서 평화와 생명의 땅을 노래하고, 민족적 삶을 방해하는 모든 비본질적 요소를 그 뿌리까지 거부한 시를 써냈다. ‘향그러운 흙가슴’의 민족 생명력을 대변하고, ‘쇠항아리’와 ‘쇠붙이’를 거부한 실천적 지성의 큰 목소리를 거침없이 시로 써낸 거인이었다.

신동엽 시인의 생가나 문학관은 4월에 가면 더 좋을 것이다. 갈아엎어야할 무엇이 있을 때, 그 마음이 갈구하는 생명의 외침이 있을 때 우리는 언제나 그의 시를 외울 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4월. 신동엽 시인의 다음 시는 둔중한 매로 우리의 가슴팍을 치며 때리며 찢고 있다.

나 돌아가는 날/너는 와서 살아라//두고 가진 못할/차마 소중한 사람//나 돌아가는 날//너는 와서 살아라//묵은 순 터/새순 돋듯//허구많은 자연 중/너는 이 근처 와 살아라. -「너에게」-

대동문화 82호 [2014 5,6월호]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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