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모퉁이에 늘어선 옛집들과 마주하면 기억 저편에서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이야기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다.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이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내면의 그리움, 그것은 마음속에서 조용히 움터왔던 진한 향수(鄕愁)였다.

길모퉁이에 늘어선 옛집들 모습에 기쁨이 앞서는가 싶더니 문 닫을 위기에 처해있는 가게들을 보니 마음 한 곳이 아려온다.

목포시 영해동 거리는 한산하기 그지없다. 이따금씩 옆 블록에 있는 입소문난 식당을 찾아 온 차량들이 길을 잘못 들었거나 시장 보러나가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인기척만 간간히 느껴질 뿐이다. 사방으로 연결된 거리엔 거미줄처럼 얽힌 전깃줄이 이곳의 이야기를 대신해준다.

92년 세월. 한결같이 지켜온 가게가 쇠락의 길에 접어들면서 이제는 주인장도, 점포를 운영하는 점원도 모두 나이 들어 거동조차 불편하다. 어떻게 더 가게 문을 열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더도 말고 딱 100년을 채워보자던 마음속의 다짐들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취재를 원치 않았다. “주인이 몹시 병환이 깊은 터라 외부에 알려지는 것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정중히 사양하겠노라.” 말한다. 1962년부터 이 가게의 점원으로 일해 오던 임라대(75세)씨가 갑자옥모자점의 주인장을 대신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구부정한 그의 모습에서 지나온 세월이 역력하다.

‘모자’로 목포 부자대열에 들어

갑자옥의 모자가 전국에 소문이 날 정도로 알려진 것이 불과 몇 십년 전 일이다. 이제는 그 인기 많던 제품을 손수 만들어 볼 재간도 없다. 물밀 듯 밀려오는 수입산 물건을 당해 낼 방법도, 유명 메이커만 찾는 사람들의 눈높이를 맞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예전처럼 번화한 시절이라면 외부에 알려진다는 것이 신나기도 하겠지만 초라한 뒷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서 몹시 씁쓸한 마음뿐이라는 이야기다.

올해 72세 된 주인장 이태훈씨는 “여태까지 살아온 것이 모두 어머니 덕”이라고 전하면서도 불편한 몸을 누이며 눈을 지그시 감는다. 무언가 생각이 가물거리는지 좀처럼 얘기하기를 주저한다.

갑자옥(甲子屋)은 갑자년인 1924년 문을 열었다. 지금부터 92년 전의 일이다. 어머니 문금희씨(1999년 작고)가 해방 직후 이씨의 외종숙에게서 가게를 물려받아 80년대 중반까지 운영하다가 이씨가 다시 맡았다.

목포 갑자옥을 어머니가 물려받으면서 이태훈씨 가족은 목포로 이사했다. 갑자옥모자점이 이곳에서 영업을 시작한 것도 거의 90여년 세월을 훌쩍 넘겼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목포 혼마치(本町·중심가)에서도 제일 중심이었다. 그때 본정통(本町通) 가게는 모두 일본인들이 운영했는데 갑자옥이 유일하게 한국인이 운영한 가게였다.

그 시절 김·면화·쌀·소금 흔히 ‘일흑삼백’(一黑三白)이라는 특산물 밖에 없던 목포에서 ‘모자’라는 신상품으로 갑자옥은 목포에서 부자 대열에 합류했다.

목포 갑자옥이 유명해지기 시작하자 이씨의 어머니는 제주도에 갑자옥모자점을 차렸다. 다른 형제들은 군산·순천·대전에 똑같이 갑자옥이란 이름으로 분점을 낼 정도였으니 그 영화는 대단했다.

현재 갑자옥 건물은 1965년 화재로 소실된 일본식 2층 목조건물을 헐어내고 지은 콘크리트 3층짜리 건물이다. 건물 맨 중앙 작은 돌판에 새겨진 ‘甲’자 하나가 상징처럼 유독 눈에 들어온다. 소실된 옛 건물에서 찾아낸 유일한 갑자옥의 흔적이다. 번성했던 시절 2층 전체를 모자 창고로 사용했고, 3층과 옥상은 학생모와 밀짚모자를 만들던 공장이었다.

해 뜨기 전부터 좌판상 찾아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엔 오전 4시 30분, 겨울엔 오전 6시에 가게 문을 열었다. 육로가 험하던 시절에 섬 지역은 물론 호남 내륙 각지를 연결하는 첫 배가 매일 6시에 목포를 떠났다. 그 배를 타고 5일장에 가서 모자 좌판을 벌일 상인들이 해 뜨기 전부터 갑자옥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갑자옥에서 만든 모자는 고급 중절모를 비롯해 학생모, 밀짚모자까지 다양했고 사람들이 즐겨 찾는 이름난 제품이었다. 아직도 그 시절 모자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가끔 가게를 찾아오지만 추억만 회상할 뿐 지금 가게 안에는 수입산 모자만이 대부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임씨는 갑자옥에 취직하기 전 학생모 만드는 기술을 배웠고 기술자로 이 가게에 왔다. 그 시절 고급 중절모 하나 사려면 나락 한 가마니 팔아야 살 수 있었다. 사람들은 으레 1번은 모자, 2번은 신발, 3번은 의복, 이렇게 단계적으로 패션을 이끌었다. 지역의 멋쟁이 신사들에게 갑자옥은 당연히 패션의 일번지가 되었다.

중절모는 양털과 토끼털, 쥐털로 만든 제품이 각각 있다. 당시 일본서 만든 쥐털 모자를 최고로 쳤다. “국산 양털모자 4만원 할 때, 쥐털 중절모는 30만원도 넘었으니 쌀 10가마는 팔아야 살 수 있었단 얘기제.”

모자를 전당포에 잡혀 돈을 빌려 쓰던 시절의 이야기를 임씨가 전했다. 영암·강진·해남·완도·진도·무안·신안까지 모두 갑자옥에서 모자를 조달하던 때였으니 번화했던 시절이 엊그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목포시 영해동은 골목이라고 하기엔 그래도 제법 큰 길목이 여러 갈래로 이어진다. 이곳은 오래된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서 옛 정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근대문화유산 1번지로 지정될만한 이 거리를 둘러보면 일제의 잔재들이 곳곳에 남아있는 역사의 산교육장이나 다름없다.

바로 옆 블록엔 ‘민어의 거리’로 지정된 음식타운이 있다. 그나마 남도음식을 대표하는 지역이라 길 건너편엔 외부 관광객들이 많이 드나들지만 갑자옥 모자점 인근의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때 정책적으로 목포를 개항하여 일본인 상인들이 줄지어 상권을 형성한 이래로 갑자옥모자점은 유일한 한국인 상점이었다는 것이 이곳의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이후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이곳에 몰려와서 상권이 형성되어 아직까지 그때의 번화한 흔적들이 가득하다. 구시가지는 어디를 가보더라도 한산하기만 하고 규모가 크게 줄어든 느낌이다. 개항 이래로 목포는 100년의 세월 성장을 멈춘 탓일까. 옛 정취를 그대로 품고 있는 골목상권들이 신기하게만 느껴진다.

오래된 거리 이제 근대문화유산으로

사방으로 넓게 열린 옛 도로는 어느덧 골목길 모양새로 변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상가 건물들 사이사이에 아직도 일본식 가옥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온다. 여행객들은 ‘길모퉁이가 아름다운 거리’로 이곳을 이름붙이기도 하지만 상인들은 이야기 속으로 흘러간 번화했던 한때의 생각만 추억으로 남아있다.

바닷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목포항동시장이 그나마 북적거린다. 항구도시답게 각종의 어물들이 줄지어 고객을 기다리고 장사하는 사람들끼리 여기저기 흥정이 오간다.

항구 근처에 줄지어 형성된 시장마다 특산코너가 이어진다. 이곳의 대표 상품이 있는 ‘홍어의 거리’도 눈에 들어온다. 비록 흑산 홍어는 찾기 어렵더라도 연근해산 홍어가 비싼 흑산도 홍어의 맛을 대신한다. 항구 너머 바로 앞에 삼학도 풍경이 다가온다.

가끔 대형버스가 좁다란 골목을 비집고 들어온다. 인터넷을 달구던 목포맛집이 대부분 이곳에 집결해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건물들과 상인들의 모습을 보면 그래서 더 반갑고 기분이 좋다. 거기에다 여전히 변함없는 옛 맛을 간직한 맛집을 만나면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된다. 그것은 몸이 느끼는 향수요, 마음속에 그리는 진한 그리움이다.

그러다가도 홀연히 우리 곁에서 사라져 버린 몇몇 건물의 흔적들이 보이면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것처럼 공허하다. 마치 화사하게 피었다가 순간 흩날리는 봄꽃처럼 그 허전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대동문화 94호 [2016 5,6월호]

정지승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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