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을 덮었던 초록이 자신을 표현하는 시간, 가을이 와야 나뭇잎들의 본디 색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어떨까.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면, 우리들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

2014년 장편소설 『표현형(Phenotype)』을 출간하고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서용좌 작가를 만났다. 그를 감싸고 있는 들뜬 분위기, 생각이 먼저 달려가 ‘표현형’의 속편을 들여다보았다. 지금의 이 모습은 어린 날로부터 시나브로 표현되어 온 그의 현재형일 터였다.

서용좌 소설가는 광주 출생으로 전남여자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 처음 독일 유학의 기회가 있었고,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교육과에서 전임을 시작하여 전남대학교 독일언어문학과 교수로 평생을 보내며, 한국하인리히뵐학회 회장과 한국독어독문학회 부회장을 맡았다. 소설 쓰기에 빠져서 명퇴를 하고 현재는 동 대학 명예교수로 있으며, 소설가로서는 한국작가교수회 회장, 국제PEN광주지역위원회 회장을 지냈다.

2001년에 소설 『열하나 그림조각』으로 첫 장편소설을 낸 이래 2004년 『희미한 인(생)』, 2010년에는 소설집 『반대말, 비슷한 말』, 2014년 역시 장편소설 『표현형』을 냈다. 대표 저서라면 『도이칠란트‧도이치문학』(2008 문화관광체육부 우수도서)과 번역서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카프카의 편지 1900-1924』(2004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등을 꼽는다. 2004년 이화문학상, 2014년 광주문학상, 국제펜문학활동상을 수상하였다. 현재는 《교수신문》에 고정 칼럼을 쓰면서 세상과 애정 어린 사투를 벌이고 있다.

손가락이 길면 게으르다 했던가, 서용좌 작가의 손을 잡으며 동질감을 느꼈다. 파충류와는 다른 차가움을 느끼며 ‘손이 찬 사람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던 옛 친구의 얼굴이 스쳐갔다.

용케도 만났다. 이 숨고 싶어 하는 사람, 은둔형의 사람들에게서 나는 늦가을의 냄새가 났다. 그의 첫말도 “용기를 내어 드러내고 싶었다.”고 했다. 소설가, 가공의 집을 진실로 짓고 현실을 사는 사람들, 이 만남도 소설의 한 장면이라면….

“네 살 때 가방을 사놓으셨던 할머니의 성화로 또래들 보다 일찍 학교에 들어갔어요. 그 덕분에 동네 언니들에게 업혀서 학교를 가기도 했지요. 소풍도 잘 못 따라가고….”

그의 삶은 그렇게 시작했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남들보다 좀 일찍 세상을 걸어야했다. 적응보다는 부적응이랄까, 아직 적응해야할 시간이 필요한 소녀시절을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보냈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어졌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성숙해지고, 그는 책들의 고향인 멀고먼 나라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인생의 수레바퀴는 제법 빨리 돌았다. 북적대는 집안에서도 돌아 앉아 스스로의 시간을 많이 가졌다. 에너지가 부족하니 겨우 공부만 했다. 책만 읽었다.

어느 날 문득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하이에나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이 밀려왔다. 다른 언어, 남의 글을 파먹고 사는 하이에나, 한밤중 자판 위 손가락이 하이에나처럼 넷씩만 남고 꼬리뼈에서 꼬리가 스멀스멀 돋아나는 느낌에 몸서리쳤다. 서툴더라도 내 글을 써야겠다고, 저절로 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밖에 있다.”

독일의 소설가 하인리히 뵐의 말이다. 좌우명처럼 외우고 사는 말이기도 하단다. 첫 번째 장편 『열하나 조각 그림』을 썼다. 사람은 사람과 결코 하나가 될 수는 없다. 사랑을 할 수는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게 타인과 하나가 될 수는 없다. 조금 외로움이 사라졌다. 사삭스런 외로움을 떨지 않기에 도움이 됐다. 사랑은 철로길 같은 수평선에 서서 동행하는 것일 뿐.

“‘열하나’는 인간관계에서의 평행선을 상징한다. 선들은 제마다 제 길을 간다는 것, 혹시 만나도 곧 다시 제 길로 돌아가는 선이다.” 이 얼마나 단순명료한 인생의 설명이랴.

사람들은 저마다의 고통이 있다. 고통을 즐길 쯤 되면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고통, 피할 수 있는 고통을 보다 모험적으로 만들어가기도 한다. 고통은 삶을 확인하는 가장 진실한 도구가 아닐까. 고통을 뺀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한지 상상만으로도 안다. 고통마다 향기가 일고 고통을 즐기는 사람은 행복하다.

유복한 집에서 편하게 살면 고통도 작으리라 생각했는데 완전 반전이다. 소설가와 대화가 참 맛있다. 긴장과 해소, 다가 올 긴장이 생각의 지평을 팽팽하게 부풀린다. 그의 말은 참 명쾌하다. 그렇다. 모든 현상은 상대가 있다. 상대적이다. 상대적이란 말은 상대방만큼 내가 있다는 것 아닌가. 구태여 하나가 될 필요는 없지. 서로가 서로를 생각할 때 사랑이 있는 것이니까.

처음 만날 때 했던 생각을 취소해야 할 시점이 왔다. 손가락이 길면 게으르다는 말, 서용좌 작가는 생각보다 일을 많이 하는 편이라 한다. 생각은 잡념으로 흘러가기에 눈앞에 보이는 일에 충실한다. 책을 읽는 일, 쓰는 일, 바느질이든 뜨개질이든 에너지가 소진될 때까지 매달린다.

따라서 하루에 두 가지 일을 잘 못한다. 한 가지 일을 마치면 거의 탈진상태, 남편이 굴처럼 파놓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호강을 누린다. 가장 가까이서 오래토록 바라보는 남편은 어쩌면 일부분에서 하나가 된 듯 여겨진다.

서용좌 작가에게 인생을 상품이라 생각한다면 자신의 히트상품은 무엇인지를 물었다. ‘어머니가 된 것’이라는 대답이 서슴없이 올라온다. 우문현답이다. 여자에게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고 함께 성장해가는 것보다 멋진 일이 또 있을까. “내 아들들이 나를 키웠다.”고 모처럼 활짝 웃는다.

그리스 델포이 신전을 감싸고 있던 안개를 잊지 못하며, 가보지 못한 메소포타미아를 꿈꾸는 소설가. ‘문학의 향기’는 ‘인생의 향기’라는 말로 대화의 종지부를 찍는다. 소설은 작가가 숨을 수 있는 좋은 장치로써 숨은 그림을 찾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며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을 추천받았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언행에 책임을 질 도덕적 의무가 있다. 심지어 자기 침묵, 그래 그 침묵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소설의 첫 페이지에 쓰인 구절을 들으며 촛불이 타는 현실의 거리가 떠오름은 당연한 일이었다.

큐피드는 화살을 한 방향으로만 쏜다.

서용좌 작가가 요즘 마음을 쓰는 일은 2014년에 내놓은 『표현형』의 후편을 쓰는 것이다. 그가 만들어 낸 가공의 인물은 한금실, 주인공인 그녀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유전자형에서 표현형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한금실을 벗어버리고 자신이 직접 서술자로 등장하는 용기를 갖고 싶은 것이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결과물이지만 현재는 미래에 의해서, 미래 때문에 규정된다. 결국 그 어떤 이야기도 자기 자신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이지 않은가. 내가 선택해서 살아갈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은행나무를 사이에 두고 긴 손을 흔들며 작별을 했다. 푸르던 은행잎이 노랗게 아스팔트를 덮었다. 태초의 생명이 흩어져 있다. 모든 것은 지금이 최선이겠지. 서용좌 작가와의 만남을 되새기며 조금 더 걷기로 했다. 돌이켜보니 모든 것이 한 방향으로만 길을 내고 있었다.

대동문화 98호 [2017 1,2월호]

김을현 기자  somchan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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