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착’의 목걸이를 달고

이향아 시인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좌우명을 써서 목걸이를 하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침착’이라고 붓글씨를 써주셨다. 내게 급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아버지가 아시고 제약하려는 의미였을 것이다. 아마도 나는 그 ‘침착’이라는 아버지의 말씀 때문에 나의 조급함이나 초조함을 다스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시자 집안이 하루아침에 주저앉아버렸다.

내가 가진 유일한 장점이라면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것, 맡은 일이면 무엇이든 혼신을 다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한 걸음씩 발전할 수 있었다. 만일 공부를 시원치 않게 했다면 나는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내게 건 꿈은 요즘의 학부모들처럼 의사나 법관으로 키우는 일이었다.”

이향아 시인을 생각하면 목화꽃 같이 환하고 따뜻하다. 늘 밝고 잔잔한 미소를 간직한 사람, 가슴께로 손을 들어 만남과 이별을 기약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모든 모습의 기반에는 ‘침착’이 들어있었구나. 빠름을 추구하는 시대에서 침착(沈着)은 인내(忍耐)보다 귀하다는 느낌이 든다. 냉정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침착이란 말이 내게로 건너왔다. 어쩌면 말의 생명이란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스승으로부터 제자들에게 전달되며 빛과 소금이 되는가보다.

천근을 들고 또 천근을 들 수 있는 시인

이향아 시인에게 등단을 전후하여 어땠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1978년. 서정주 시인과 함께

“서정주 선생님의 안내로 대학에 입학하였다. 선생님이 평소에 나를 많이 칭찬하곤 하셨으므로 당연히 재학시절에 등단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졸업할 때까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졸업 후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에 교사로 가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을 때 선생님은 취직기념이라면서 내 첫 번째 현대문학 추천을 해주셨다. 현대문학은 세 번의 추천을 받아야 하는데 마지막 추천은 결혼기념 선물이라면서 해주셨다.

나는 한 번도 추천에 조급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내 자존심이었다. 어쨌든 나는 시를 쓰면서 살 것이고 우리는 결국 한 마당 식구들인데 내 언행과 미덕은 후에 문단의 비사로 남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추천사에서 선생님은 ‘천근을 들고도 또 천근을 들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시인’이라고 칭찬하셨다. 그러면서도 선생님은 왜 그리 늦게야 나를 추천하셨을까, 의심스러웠다. 아마도 주변에 너무 많은 제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서정주 시인의 서재에는 큰 항아리가 하나 있었는데, 제자들이 작품을 가져가면 그 자리에서 읽지 않고 “나중에 읽지” 하면서 그 항아리 속에 넣으시곤 했다고 한다. 서정주 시인의 방, 큰 항아리 속에 작품을 넣고 간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서정주 시인과 이향아 시인의 모습이 향기처럼 그려진다. 오랜 시간을 항아리 속에서 숙성되는 그런 향기. 한쪽은 지켜보고 한쪽은 바라본다. 그 사이의 바람은 서두르지도 않고 보채지도 않는다. 마치 ‘케 세라 세라’의 가사처럼 ‘이뤄질 것을 꼭 이뤄질 것을 믿는’ 그런 마음이 보인다.

서정주 시인은 끝내 한마디 덧붙인다.

“향아는 점잖아서 우리 집사람이 더 좋아해.”

그 말씀은 이향아 시인이 문단 등단을 위해 바장거리지 않았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사람은 닮고 싶은 사람을 시나브로 닮는다.

22번째 시집을 상재한 이향아 시인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닮는 것’이라하면 한편으로는 맞고 한편으로는 틀리다. 외형적인 닮음은 전자에 해당하겠지만 내면적인 닮음을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향아 시인에게서 닮음의 미학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롤모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나는 ‘퀴리 부인’전기를 읽으면서 그가 학문적으로 크게 성취했음에도 그를 본받을 생각이 없었다. 구멍 뚫린 양말을 신고 추운 연구실에서 너무 고생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이 싫었다. 그에게 생활의 멋이 없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설을 읽으면 주인공의 입장이 되곤 하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카알레트 오하라도 본받고 싶지 않았다. 그가 너무 저돌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여자의 일생’의 잔느는 너무 능동성이 부족하여, 운명의 파도에 휩쓸려 다녔다. 나는 불행한 주인공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닥터 지바고’의 라라를 나는 받아들일 만큼 가슴이 넓지 않았다. 나는 지나치리만큼 도덕적이다. 나는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이었던 C선생님을 오랜 동안 좋아하였다. 그는 우선 실력이 뛰어났고 매력이 있었으며 개성도 강하였다. 나는 그가 입었던 저고리의 색깔과 머리모양과 구두의 디자인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는 독신으로 살면서 교육자로서도 성공하였다. 그러나 내 친구들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친구들이 유치하여 그의 가치를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1979년. 세계여류작가대회 참석

나만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 이향아 시인은 일찍이 자신의 가치와 방향을 확고하게 설정했다. 한번밖에 살수 없는 삶에서 머뭇거리고 방황해야 할 일은 최대한 피해야 했다. 진실은 흙속에 들어있는 돌덩어리 같은 것,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향아 시인을 아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다. ‘바를 정(正)자’같은 사람이란 말이다. 어차피 ‘언행과 미덕’은 어떻게든 남아 지나간 사람을 평가하는 법이거니.

어느 날 이향아 교수가 학교에서 수업을 하는 모습을 본 친구가 “넌 어쩜 C선생님과 똑같은 스타일로 수업을 하니?”하면서 놀랐다고 한다. 어느덧 자신이 하는 짓이 시나브로 그때 그 선생님을 닮아 있었던 것. 그렇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그때 몰랐던 것을 경험하면서 환호를 터트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이랴.

제2의 인생 ‘그림으로 시를 짓다’

이향아 시인은 그림으로 제2의 인생을 선언했다. 어렸을 때부터의 꿈이기도 했던 그림, 벌써 단체전에 10여회 참여했고 금년 12월 5일 인사동 경인갤러리에서 제3회 개인전을 계획하고 있다. 그는 체력이 허락하는 한 끝까지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고 한다. 그것은 평생을 써온 시의 연장선일거라고 믿는다. 어쨌거나 이향아 시인은 뼛속부터 예술가란 생각이 든다. 시가 없었으면 생의 싹이 트지 못했을 것이며 그림이 없었으면 화려를 보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는 스무 살 때에 모 문예지 신인상에 응모하면서 스스로 필명을 이향아(李鄕莪)라고 지었다. 시골향 鄕, 다북쑥 莪. 고향의 밭두렁이나 언덕에 이른 봄이면 피어나는 다북쑥. 그것은 생명력과 함께 향기를 가지고 있다.

서정주 시인이 이향아란 이름과 이향아의 시가 닮았다고 자주 말씀하시곤 했다고 한다.

이향아 시인은 앞으로의 계획을 짧게 말한다.

“나는 새로운 활동을 계획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계속할 것이다. 글을 열심히 쓸 것이다. 그리고 그림도 열심히 그리고 발표회도 자주 가질 예정이다. 인터넷 문학카페를 운영한지 15년이 되었다. 시낭송회를 이끌어온 지도 10년이 가까워진다. 그 일도 꾸준히 계속할 것이다. 후배들을 교육하여 참다운 문학이란 어떤 것인가를 교도할 것이다.”

공간시낭독회 제400회 기념식에서

그리고 문학을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학판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 중에는 다소 허영에 들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문학은 호화롭지 않은데 대부분 호화로운 꿈을 꾸는 것이다. 시인과 작가는 아니다. 그들은 고독한 경작자이다. 특히 근래에는 아이들을 다 성장시킨 주부들이 여가를 활용하여 문학공부를 하면서 자칫 문학의 본질에서 벗어난 생각을 할 위험성이 많다. 좋은 작품을 쓰려고 하기보다 신문이나 잡지에 나고 이름이 알려지고 유명해지는 것에 더 마음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학의 길에 든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좀 더 고독해져야 한다. 고독은 외로움과 다르다. 고독은 철학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고독은 스스로의 모습을 응시하는 일이다. 그것은 생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하며 자신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22번째 시집, 안개 속에서

이향아 시인은 올 겨울 22번째 시집이 나온다. 15권의 수필집, 7권의 문학 이론서 등 50여권의 저서를 집필을 해 온 이향아 시인. 평론가 유한근 씨는 “이향아 시의 전편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 슬픔이라는 정서이다. 그의 시가 아이러니라는 표현구조와 지혜의 언어로 우리를 위무해주고 있지만, 먹먹한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마도 시인이 전언하려고 하는 진실이 ‘슬픈 인간 존재’ 때문은 아닐까? 그것도 서정시의 정수인 비가(悲歌)를 통해.”라고 말한다.

평론가 유한근은 이향아표 슬픔, 한민족을 대변하는 슬픔,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슬픔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우리들의 원천적인 한과 슬픔의 정서. 그래서 쉼 없이 슬픔과 기쁨을 섞어내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향아 시인의 혈관을 통과하여 가슴으로 품어낸 시들. ‘아지랑이가 있는 집’, ‘자족하기’, ‘그것이 걱정입니다’, ‘패랭이꽃’, ‘우등고속을 탈 때’, ‘마른 꽃다발’ 등 제목만으로도 가슴에 아련한 진동이 느껴진다. 마치 5번째 기타 줄을 퉁긴 듯 묵직하고도 긴 여운을 주는 것이다.

이향아 시인은 충남 서천에서 출생하였으나 유년기 이후는 전북 군산에서 성장한다. 서정주 시인과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 학원(學園), 여원(女苑) 등의 독자문예란에서부터 인연이 이어졌다. 서정주 선생님의 안내로 서라벌예술대학에 입학, 전교최우등생으로 졸업하고 다시 경희대학교 국문학과에서 수업하였다. 경희대학교 대학원 석·박사과정을 졸업하고 <현대시에 나타난 삶의 인식방법 연구>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가 되었다. 1963년부터 3년에 거쳐 ‘현대문학’ 추천으로 문단에 나온다. 이후 경희문학상, 시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문학상 아시아기독교문학상 등 많은 문학상을 수상한다. 현재 호남대학교 명예교수,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고문.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기픈시문학회 회장. 동북아기독작가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동문화 103호. 2017. 11~12월호>

김을현 기자  somchan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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