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과 연필 등의 필기구가 등장하기 전, 서예를 배우는 학생들이 많던 그 시절에는 집집마다 붓 하나쯤은 다 가지고 살았다. 어릴 적 서예시간이 들어 있는 날은 학교 앞 문구점에서 화선지를 사고 연습용 신문지를 준비해 가곤 했다. 그날 교실은 온통 먹 냄새가 번져 있었다.

서당에서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던 그 시절에도, 김정희가 조선만의 글씨체를 연구하던 그 시절에도, 김홍도가 그림을 그리던 그 시절에도, 붓은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그 물건을 50여 년 넘게 만든 사람이 있다. 소천 채태원이다. 어떤 한 가지 일에 평생을 바친다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도 움직이게 만드는 것 같다.

‘소유하기’보다 ‘공유하기’

지난 2013년 10월 예술작품을 ‘소유하기’보다 ‘공유하기’로 돌린 소천 채태원 선생의 기증 작품에 대한 특별 전시회가 마련돼 화제가 됐었다. 담양군은 채태원 선생의 소장 서화작품 기증식과 더불어 한국대나무박물관 갤러리에서 기증작품 150여 점 중 50여 점에 대한 전시회를 마련했다.

전시회는 남도 전통 3대 명필장으로 알려진 소천 채태원 선생이 평생 소장해오던 작품들이 걸렸다. 작품들에서는 시간이 느껴졌다. 의재 허백련 선생의 사군자 4점을 비롯해 송국 안귀동 선생, 학정 이돈흥 선생, 장전 하남호 선생 등의 작품들은 깊이가 아름다웠다.

소천 채태원은 전남 담양 창평 출생이다. 1973년 제1회 인간문화재 공예작품전 입선을 시작으로, 제2회, 제3회에서도 입선한 바 있으며 1993년에는 제23회 전남공예대전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는 평생 붓을 만들었으며 그 시간들이 내부로 쌓여 지금은 붓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채태원은 남도 전통 3대 명필인 붓 제작에 매진해 와 소천 붓의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아무리 위대한 서화도 그 시작은 붓이다. 당대 이름 높은 서화가들의 글씨와 그림은 그가 만든 붓의 힘을 빌려 완성됐다.

“제가 소장한 작품들은 모두 저의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어요. 50여년 동안 서화작가들과 교분하면서 소장하게 된 것들이죠. 원래 제 것이 아닌 것들이 잠시 제 것이었다가 원래 주인들에게로 되돌아간 거예요. 기증을 결정하고 정말 마음이 편했어요.”

공유의 힘은 크고도 깊다. 담양군이 장학기금이나 불우이웃 돕기 성금의 기탁 받은 사례는 많았다. 그러나 아무 조건 없이 문화예술작품을 기증받게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담양군은 그의 기증을 계기로 많은 예술가들이 예술작품을 기증할 수 있도록 담양군 문화재단을 설립했다. 또 기증 작품을 보관할 수 있는 수장고를 더욱 더 보강시켜 나갈 계획을 세웠다.

50년, 붓으로 점철된 일생

사람들은 통상 대나무 붓을 진다리붓이라고 부른다. 진다리붓은 광주시 백운동의 한 마을에서 따온 명칭이다. 그가 만드는 진다리 붓의 필간은 대나무를 주소재로 한다. 필호(붓의 심지)까지도 대나무를 잘게 쪼개 만드는 죽필, 칡 줄기로 만드는 갈필, 볏짚을 쓰는 고필, 태아의 머리털로 만드는 태모필, 양호필, 황호필, 장액필, 닭털필, 마필, 낭모필에 이르기까지 붓의 종류는 10여 가지가 넘는다.

그는 어릴 적 조부에게 붓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본격적으로 붓에 세계에 뛰어든 것은 25세 때다. 1960년대 저물어 가던 때, 대하 김복동 선생(광주시 무형문화재 4호) 문하에 들어가 우리나라 전통 붓 제작기법을 완성했다.

사적으로 그와 동서지간 이기도 했던 대하 김복동 선생은 지난 2009년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선생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우리나라 진다리붓의 최고 거목이었다.

그는 김복동 선생의 수제자로 3년 남짓 전통 붓 제작기법을 전수받았다. 그러나 진다리붓 광주시 무형문화재 전수자로 선정되지는 못했다. 수제자의 경우 통상 5년 이상 스승에게서 사사를 받아야 전수자로 인정하는 조건에 부합화지 못했던 탓이다.

하지만 그는 진다리 붓 제작기법을 뛰어넘어 소천필로 그만의 명필장 자리에 올랐다. 그의 붓은 특히 박정희 대통령 시절 육영수 여사가 좋아했다. 대한민국 여성회관 문예부서에 정기적으로 납품이 되었고,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도 고위 공직자는 물론 국내 문인, 서예가들의 호평 속에 중앙으로 매년 상당량이 팔려 나갔다.

의재 허백련 선생도 그의 붓을 좋아했다. 선생이 직접 그에게 붓의 재료로 쓰이는 필호(털)를 추천하고 권장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남도 붓글씨의 대가로 손꼽히며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송곡 안기동 선생 역시 그의 붓을 주로 사용했고, 우리나라 서예와 한학자로 명성을 날리는 담헌 전병옥 선생, 강암 송성용 선생, 소암 현중화 선생은 물론 담양출신인 학정 이돈흥 선생도 그의 붓을 아끼고 사랑했다.

자기 기술, 누군가의 다음 생으로 옮겨 놓는 게 소원

진다리붓과 소천 붓을 만드는 대한민국 최고의 명장 소천 채태원, 그가 다시 고향으로 갔다.

“더 늦기 전에 담양에서 살고 싶었어요. 조금 늦었지만 이제라도 고향 담양에 정착해서 제가 가진 전통기법과 문화적 가치를 지역에 남겨 줄 수만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요. 그리고 예전에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지금은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이를테면 자손들에게 남겨줄 것이 이것뿐이라는 것도 무시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야 잊지 않고 대를 이을 거 아닙니까?”

시간은 무서운 것이어서 반드시 지켜야 할 옛것들이 쉽게 지워져 간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제가 가진 기술을 누군가의 다음 생으로 옮겨 놓는다. 그 역시 먼저 산 옛 사람의 기술을 옮겨 받았을 뿐이었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예요. 문화가 곧 지역의 경쟁력이고, 전통의 기술이 최상의 문화콘텐츠가 될 수 있어요. 우리지역 출신 문화예술가나 전통문화 전승자들이 늦었지만 고향으로 돌아와 대접받는 풍토가 조성됐으면 정말 좋겠어요. 저는 고향으로 돌아와 마음이 한껏 기뻐요. 담양군이 대나무박물관 등 합당한 곳에 전시체험관을 마련해주면 많은 작품들을 기증할 생각이에요.”

기술을 얻기 위해 보냈던 그 무수한 날들이 보상받기 위해 걸어온 세월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어떤 보상을 기다린다. 제가 걸어온 길을 누군가에게 잇는 것, 그는 그것이면 족하다.

대동문화 85호 [2014 11,12월호]

한경숙 기자  webmaster@chkorea.news

<저작권자 © 채널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