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약이다. 시간이 해결사다. 폭염과 불쾌지수로 기세등등하던 계절 여름도 시간 앞에 장사 없다. 돌고 도는 세상의 이치에 여름이 서럽겠다.

여름뿐이랴. 가을이란 놈도 마찬가지다. 겨울잠 자는 동물들은 꽉 찬 영양분의 가을걷이를 놓치지 않고 주워 담는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곡간의 식량들을 바라보면 흐뭇하다. 그 풍성함을 세상에 뿌려주는 가을인데 어찌 돌고 도는 세상을 좋아할 수 있으랴. 더 보면 사계절이 다 좋긴 하다. 한 해 내내 시답잖은 시간은 없겠다.

독서의 계절이 가을이다. 그러나 지식 창고를 채워주는 가을독서도 좋지만 인간의 행복을 위한 맛있는 음식의 가을을 또한 기릴만 하다. 미식(美食), 몸에 좋은 음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제철’이다. 계절마다 제철음식이 있지만 특히 가을에 만나는 음식은 그 중 으뜸이라 하겠다.

여름 내내 이글거리는 태양과 씨름하며 벌겋게 익어온 고추가 가을 들녘을 장악한다. 밭에서 막 수확한 붉은 고추를 잘 익은 쌀밥 서너 숟가락과 멸치액젓 넣고 물고추로 간다. 부드럽고 연한 열무와 버무려 밥상에 오르면 너끈히 ‘ 밥도둑’이다.

카로틴성분이 많아 장수식품으로 손꼽히는 호박, 아직 완전하게 익지 않은 늙은 호박을 굵게 썰어서 통통하게 살 오른 갈치 찜이나 고등어를 넣고 조림을 하면 그 담백한 감칠맛이란. 까다로운 입맛도 사로잡을 또 하나의 밥도둑이다.

가을 먹거리의 대명사는 뭐니 뭐니 해도 밤과 대추이다. 산언저리에 지천으로 널려 벌어진 밤송이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렌다. 주렁주렁 대추는 보고만 있어도 군침 돈다.

차진 찹쌀을 불려 밤과 대추를 듬뿍 넣은 약식은 어떤가. 약식은 주로 정월 대보름날에 즐겨먹던 음식이었다. 요즘에도 잔칫날이나 집안의 대소사에 약식은 늘 자리한다. 떡과 함께 중요한 간식이기도 하다. 가을의 푸짐한 밥상에 잘 익은 밤과 대추를 넣은 약식을 올려보는 것은 어떨지.

바다 향 그윽한 생선이 보약이다

바다향기 그윽한 등 푸른 생선은 젓가락 전쟁을 부른다. 먹는 것 두고 그 누가 눈치 살핀다냐? 가을 고등어는 살이 올라 보기만 해도 고소한 식감이 입안을 맴돈다. 노릿하게 구워낸 등 푸른 생선의 선두주자 고등어는 서남해안 일대에서 많이 잡힌다. <자산어보>에 한자로 皐登魚라고 적히기도 한 이 생선은 DNH성분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 뇌세포를 키우고 두뇌회전을 원활하게 한다. 때문에 치매예방에도 좋다.

또한 핵산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노화방지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여성에게 인기가 높다. 고등어는 구이뿐만 아니라 도톰하게 썰어 넣은 늙은 호박과 간장 조림을 해 올리면 그야말로 최고 수준의 밥도둑일 터.

‘집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가을 전어는 가을 한 철 가장 인기 있는 생선이다. 막 썬 회부터 시작하여 구이, 찌개 등으로 버릴 것이 없다. 전어는 포를 뜨지 않고 뼈째 썰어야 제 맛이다. 그래야 씹는 맛과 담백함이 더한다. 양질의 굵은 소금을 뿌린 전어구이는 짭조름함에 담백함을 더해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과식의 위험성이 대단히 커 건강을 위협하기 쉬운 ‘경계식품’이다.

살짝 시지근하게 익은 열무김치에 둘둘 감아 잘 익은 소주잔과 섞으면 그 담백함의 풍류는 오랫동안 입안에 여운으로 남는다. 전어회무침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일품이다. 두말할 것 없다. 그 맛을 논해서 얻고자 함이 무엇인가. 잘게 썬 횟감에 양파와 깻잎, 향 짙은 미나리를 넣고 오래 숙성된 고추장에 버무려 낸다. 안주면 안주, 반찬이면 반찬, 회덮밥에 심지어는 맨입으로 먹어도 또 손이 간다.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는 늦가을 목포 영산강 하구언의 방조제와 금호방조제는 밤마다 갈치 잡이 낚시꾼들이 불야성을 이룬다. 따뜻한 수온을 따라 올라오는 갈치를 포획하기 위해서다. 이때 잡히는 녀석들은 그다지 큰 사이즈는 아니지만 맛은 일품이다. 즉석에서 썰기도 하고 소금구이로 먹기도 한다. 찬바람과 함께 미네랄이 풍부한 바닷가에서의 갈치와 한 잔은 운치와 함께 각박한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아름다운 유혹이다.

요즘 ‘뭣이 중헌디?’가 유행이다. 영화 ‘곡성’에서 나온 말이다. 요즘세상에서 ‘뭣이 중헌디?’라는 질문에는 ‘건강이 중하제’가 정답이겠다. 좋은 음식을 제대로 먹는 것은 참 중요하다.

밥상 물린 후 깨물다-상큼한 가을 한입

가을을 가득 메우는 또 하나의 먹을거리는 가을 과일들이다. 배와 포도, 감, 석류 등이 저마다 때깔 좋은 옷으로 갈아입는다. 보기만 해도 먹음직하다. 여름 내내 강한 일광욕을 즐긴 후 우리의 가을을 풍성하게 만드는 과일의 유혹이다.

심한 무더위를 겪은 올해 과일은 당도가 높고 비타민이 풍부하다. 따라서 우리의 건강을 지키는 최고의 음식으로 가을과일을 손꼽을 수 있겠다.

후식은 과일 말고도 식혜나 수정과가 있다. 식혜는 우슬(牛膝)식혜나 호박식혜 또는 두릅나무식혜를 해먹는다.

우슬은 쇠무릎이라고 하여 한방(韓方)에서 관절에 좋기로 소문난 약초다. 가을에 우슬을 캐서 깨끗하게 세척한 후 물을 붓고 끓인다. 그 물로 식혜를 만들어 먹는데 그것이 우슬식혜다. 당연히 관절에 좋은 약제이고 보면 관절건강에도 좋을 수밖에 없다.

두릅나무 끓인 물에 식혜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두릅나무는 혈관 내 노폐물 중 유해콜레스테롤을 녹여 배설하게 해주는 효능이 있다. 때문에 고혈압과 동맥경화증에 좋다고 한다.

먹을거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계절 중 정서적으로 가장 안정감이 있는 계절이다. 여름내 기승을 부리던 습기가 사라져 구름이 많지 않기 때문에 하늘은 높게 보인다. 청명하고 높은 가을 하늘은 먹을거리만큼 풍성한 감성을 준다. 코스모스, 들국화를 포함하여 지천에 깔려있는 야생화는 높은 하늘과 어우러져 그 운치를 더한다.

먹을거리만 챙길 것은 아니다. 가을에는 과일 말고도 우주(宇宙)의 자연(自然)도 깨물어야 한다. 무한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빚어진 ‘스스로 그러함(자연)’을 맛보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인 것이다.

겨울을 준비하는 야생의 동물들은 영양분이 풍부한 음식을 섭취한다. 겨울을 이기기 위해서다. 알밤과 도토리 그리고 가을걷이를 마친 논밭의 곡식들을 긁어모은다. 가을이 풍성한 것은 겨울이 삭막하고 춥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들은 자연이 준 선물을 기회다 생각하고 얻어 섭취한다. 지혜일러라.

밥상에 계절의 정취를 더하여 명상(冥想)을 누린다. 귀한 벗들 있어 더 행복하다. 당신의 가을이다.

대동문화 96호 [2016 9,10월호]

이동호 기자  ddmh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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