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준 전 국립덕수궁미술관장.미술비평가

예로부터 광주.전남지역은 한국 근대전통화단의 6대가 중의 한분으로 남종화풍의 대가로 잘 알려진 의재 허백련과 우리 서양화단에 최초로 서구인상파 화풍을 소개한 오지호, 한국현대추상미술의 선구자 수화 김환기, 치열한 현장사생을 바탕으로 한 소나무 그림의 남농 허건, 현대채색화의 대가 천경자 등을 배출한 대표적 예향이었다.

1930년대 이후 이어진 이들의 혁신적이고 진취적인 예술 활동은 수많은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지금까지도 한국미술문화의 커다란 자양분이 되고 있다.

미술학도로서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이 분들을 처음 뵙던 가슴 떨리던 시간을 되돌아보면 "그래도 난 참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렇게 광주.전남지역은 한국 근.현대미술문화의 기본 토양이 되었던 중요한 지역인 까닭에 지금도 많은 후배 작가들이 그 뒤를 잇고 있으며 광주시립미술관이나 광주비엔날레재단, 대동문화재단을 비롯한 다양한 미술문화 관련기관들이 설립되어 전통 예향의 맥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 오고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작년 9월에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개관을 하는 등 바야흐로 광주전남 미술문화계의 르네상스 시기가 도래 한 것 같아 이 지역 출신 미술인의 한사람으로서 참으로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런 결과물들이 수많은 선배들의 눈물과 노력의 결과물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만 하더라도 80년 5월에 민주화의 꽃으로 산화한 선후배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과연 설립될 수 있었겠는가? 당시 대학생 신분으로 그들과 함께 금남로에서 최루탄을 마셨던 나는 그런 면에서 미안함과 나의 부족함에 지금도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래서 타 지역의 문화기관에서 근무하면서도 항상 고향에서는 즐겁고 좋은 일만 생기길 기원 했었고 광주비엔날레가 광주시민의 힘으로 처음 태동 했을 때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특히, 모든 것이 미진하였던 제1회 광주비엔날레 때는 전시오픈 전날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식구들과 날밤을 세워 전시장 구성과 작품설치를 지원했던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런데 지난 1년여 동안 광주전남 미술계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별로 즐겁지가 못한 것 같다. 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의 선임 문제부터 전남도립미술관 설립문제까지, 미술인들은 물론이고 지역 시민들까지 초미의 관심을 갖는 문제에 대해 각계 시민과 관련기관 사이에 범시민적인 의견수렴을 바탕으로 한 합의가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광주비엔날레만 하더라도 대표이사를 선출하기는 했으나 일부 전시추진을 위한 정책방향에 있어 지역 미술인들과 협의하고 논의해야 할 부문에서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전남도립미술관 설립문제는 아직까지 착공도 하지 않고 있어 목표로 했던 2018년까지 완공하려면 부실공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마저 대두되는 실정이다.

문화는 오랜 시간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성숙한 체험의 과정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피어나는 정신적 산물이다. 문화 강대국으로 불리는 선진국들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창의적인 미술문화를 꽃피우기 위해서는 예술행정가들의 원대한 시각과 미술인들의 치열한 작업과정을 통한 독창성이 어우러졌을 때 비로소 문화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몇 년 전 독일 출장 시 보았던 카셀도큐멘타만 보더라도 시당국에서 카셀도큐멘타 전시장 옆에 마니페스타라는 청년작가 기획전시 공간을 별도로 설치함으로서 세계적 작가들 속에서 지역 작가들이 소외받지 않도록 배려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관람객들도 도큐멘타 본 전시장과 지역작가 전시장을 차별하지 않고 구석구석 열심히 찾아다니며 보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예술인들과 관계기관이 시민을 위해 서로 배려하는 협의의 미덕이 형성 되었을 때 비로소 격조 높은 미술문화가 꽃 피울 수 있는 것이다.

2001년 오광수 국립현대미술관장과 함께 기획한 "수묵의 향기.수묵의 조형전"이라는 한.중.일 현대수묵화전만 하더라도 세계현대수묵화의 주도적 흐름을 한국에 가장 먼저 빼앗기고 말았다는, 일본의 대표적 미술평론가인 요네쿠라 마모루 교수의 한탄을 들을 정도로 뜻 깊은 기획 전시였다. 하지만 관장이 바뀌고 더 이상 전시를 이어가지 못하게 되자 중국화단에서 아시아 현대수묵화의 선두주자를 자처하는, 아쉬움을 남긴 선례도 있었듯이 문화를 기획하는 예술행정가들은 항상 창의적이면서도 먼 미래를 바라보는 기획의 장을 펼쳐야 된다고 생각한다.

광주.전남인의 한사람으로서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전시기획에 종사했던 한 사람으로서 국립아시아문화의 전당이 아시아 문화를 모두 아우르는 총본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광주비엔날레가 베니스비엔날레처럼 세계적 축제의 장이 되어 외국인 방문객수가 베니스비엔날레의 반만이라도 미칠 수 있기를 바란다면 나의 욕심일까?

현대 화단에서 정통성을 이어받는 허백련과 오지호의 후학을 길러 내기 위해 시장이나 문화단체장들이 쟈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처럼 점심 때 조용히 청년작가 작업실을 방문하고 차를 나누는 그런 진정성을 꿈꾸어 보는 것이 헛된 바램일까?

이런 문화적 성숙함이 하루아침에 길러질 수 는 없겠지만 최소한 어느 지역보다도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광주전남 시민들은 문화시민으로서 가장 먼저 그런 자질을 갖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문화기관 관계자들은 갑의 입장이 아니라 을의 입장에서 그 보조자 역할에 충실했을 때 진정한 광주화단의 미술문화가 꽃 필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장영준 전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관장.미술비평가  curcyj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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