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 소한에 얼어 죽은 사람은 있어도 대한에 얼어 죽은 사람은 없다. 소한 추위는 꾸어가라고도 한다’라는 우리 속담이 있다. 소한 때부터 입춘 때까지 약 한 달간의 혹한에 잘 대비하라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의 말씀일 것이다.

농촌에서 자랄 때, 그해 겨울에 눈이 많이 와야 그 이듬해 풍년이 든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올해는 소한, 대한이 다 지났지만 추위다운 추위가 아직은 없는 것 같다. 큰 추위는 없었지만 대한인 지난 20일에 광주에는 눈다운 눈이 내렸다. 모처럼만에 내린 눈 덕분에 주말에 무등산 겨울 산행을 다녀왔다.

겨울산행은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낙상 방지를 위한 아이젠 착용은 필수다. 오늘 산행 코스는 증심사 주차장 ᐅ 새인봉 ᐅ 새인봉 삼거리 ᐅ 서인봉 ᐅ 중머리재 ᐅ 당산나무 ᐅ 증심사 주차장으로 시간상으로 약 네 시간 정도로 예상한다.

겨울산은 적막하다

산에 오르기 전에 제법 찬바람이 불어서 걱정했는데 막상 산속에 들어서니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너무나 포근하다. 이래서 무등산을 어머니 품속 같은 산이라 하는가 보다. 인구 150만 명이 넘는 도시에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이 있는 곳은 광주가 유일하다고 하니 광주시민들은 행복한 시민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산은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절기의 산보다 겨울의 산은 독특한 매력이 있다.

잎을 다 떨군 채 서 있는 겨울나무들은 오히려 본질적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겨울나무는 그 추위 속에서도 굳건히 버티고 섰다. 나무줄기에 가만히 귀를 대고 있으면 그 몸속에 끊임없이 돌고 있는 수액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고 현란한 위선과 가식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 인간들 과는 대조적이다. 겨울산은 이런 가식들을 벗겨낸다. 산짐승들은 깊은 겨울잠을 자고 있고 이따금씩, 까악 까악 대는 산 까마귀만이 겨울산의 적막감을 더해 준다.

임금님 옥새를 닮은 새인봉(璽印峯)

산에 들어선 지 약 30여분이 지났다. 돌계단과 데크길, 잠깐의 대숲을 지나고 나니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며 헐떡 거린다. 산아래 도심에서 밥 끓여 먹고 살기 위해 내쉬던 ‘노동의 헐떡거림’과는 차원이 다른 유쾌한 ‘운동의 헐떡거림’이다. 쉼터에서 인절미 한 조각과 따끈한 유자차 한잔으로 에너지를 보충한다. 겨울산행 중 최고의 간식으로는 인절미가 제격이다.

약 30여분을 더 오르니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 두 개가 나온다. 정상의 바위덩이가 임금님의 옥새 같다 하여 새인봉(璽印峯) 또는 인괘봉(印掛峯)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남동쪽의 투구봉(감투바위)과 맞은편의 선두암(船頭岩)이다.

선두암은 그 모습이 뱃머리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선두암의 절벽은 딱 한 칼로 자른 듯한 10여 미터 높이에 직각의 벼랑을 이루고 있어 산악인들의 암벽등반 훈련장으로 안성맞춤인 곳이다. 정상 높이는 490m이다. 정상에 오르니 광주시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옆으로는 고즈넉하게 약사사가 보인다. 약사사를 멀리 바라보면서 이제부터는 새인봉 삼거리까지는 내리막 길이다. 약 20여분을 데크 계단과 좁은 등산로를 따라 내려가면 새인봉 삼거리에 도착한다. 새인봉 삼거리는 약사사, 새인봉, 중머리재로 가는 세 갈래길이 만나는 곳이며 중간 쉼터이다. 최근에는 ‘동적골’ 쪽에서 오는 새로운 등산로가 만들어졌다. 삼거리가 아니라 새인봉 사거리로 바꿔야 한다.

무등산의 중심 허브, 중머리재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는 법, 등산뿐만 아니라 우리 사는 세상 이치가 다 그렇지 않겠는가. 새인봉 삼거리를 지나면 경사가 급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중머리재 까지는 약 삼사십 분 정도 걸린다. 이제부터는 내리막이나 평지는 거의 없고 순전히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산행 초보자들은 피해야 할 코스이다.

그렇다고 너무 겁먹지는 마시라. 우거진 숲 속길 인지라 충분한 삼림욕을 즐길 수 있으며, 낙락장송과 돌무덤 등 아기자기하게 볼거리가 많은 길이다. 오르다 보면 어느 순간 능선을 지나 숲 속을 벗어나면서 시야가 확 트인다. 서인봉이다. 밑으로 민둥 한 개활지가 나타난다. 바로 중머리재다. 그 너머로 중봉, 장불재, 입석대, 서석대 그리고 무등산의 정상인 천왕봉이 구름에 가려 아스라이 보인다.

중머리재는 바람 때문에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아 마치 스님의 머리를 연상케 한다고 하여 중머리재라 불린다고 한다. 마침 중머리재를 순찰하고 있는 국립공원 관리공단 직원에게 중머리재의 유례에 대해 물으니, 무등산의 중심 허브 역할을 하는 곳 즉, ‘무등산의 중앙’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토끼등을 거쳐 무등산장 쪽으로 갈 수도 있고 중봉에 오를 수도 있다. 직진하면 장불재로 가는 길이다. 해발 617m로 딱 중간 지점이다.

“산은 ‘오르려는 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려는 자’를 위해 거기에 있다”라고 소설가 이외수는 말했다. 그러나 이 말에 절반만 동의하고 싶다. 오늘은 서석대를 바라만 보고 가지만, 봄이 오면 ‘광주의 기상이 발원되는 곳’ 서석대를 올라 보리라.

중머리재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광주시내의 모습이 꽤나 관념적이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했다. 지금 당장 부딪히고 있는 현실세계가 비극이라 할지라도 조금은 멀리 떨어져서 지나왔던 아름다운 과거를 회상하거나, 혹은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희극일 것이다.

산행 후 마시는 한 잔의 막걸리는 보약

산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 조심해야 한다. 산악사고의 80%는 하산 도중에 일어난다고 한다. 특히 겨울철 산행은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 아름다운 설경에 취해서 발밑에 있는 구덩이를 잘못 디뎠다가는 바로 골절상을 입을 수 있고 미끄러져 낙상사고도 빈번하다.

특히 산행 중 과한 음주는 금물이지만, 산행 후 마시는 한 잔의 막걸리는 보약과도 같다. 특히 증심사 B식당은 막걸리 한 병만 시켜도 열 가지가 넘는 안주가 나온다. 그야말로 산꾼들의 천국이다. “한두 잔만 하고 가자” 해놓고서는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몇 병이 돼버린다. 도통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다. 헤롱 헤롱 알딸딸이다!

임영열 시민기자  youngim1473@hanmail.net

<저작권자 © 채널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