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 그리운 사람 최명희

혼불, 최명희 문학관

노적봉에서 새가 운다. 새는 울음으로 자신을 알린다. 이 소리는 뻐꾸기다. 그 희미한 소리에 마음 빗장이 녹아내린다.

소설가 최명희

처음 혼불을 알게 된 것이 언제였던가. ‘언어는 정신의 지문, 나의 넋이 찍히는 그 무늬를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라던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너른 마당을 휘적휘적 걷다가 ‘소살소살’ 정자에 올랐다. 이 바람, 나도 몰래 손바닥으로 바람을 비벼본다. 살타는 냄새가 고약하다.

혼불은 도깨비불이라고도 한다. 남자의 혼불은 대빗자루처럼 길고 여자의 혼불은 사발모양이란다. 혼불은 사람이 죽기 전에 먼저 육신을 떠나고, 혼불이 떠난 육신은 주검이다.

최명희 문학관을 들어서자 살포시 미소짓는 소설가 최명희. 육신의 떠난 혼불이 타오르고 있다. 오직 한 편, 혼신의 힘을 다해 ‘혼불’에 전력했던 흔적이다. 그렇다. 많고 넓음보다 좁고 깊음도 필요했다. 한 사람이 남긴 한 편의 글이 이토록 질긴 인연의 사슬을 만들었다. 그녀의 집필실 ‘성보암’ 앞에서 기도하듯 섰다. 만년필로 원고지를 쓰던 시절,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모국어를 새겼다’는 말이 마음 한가운데로 가라앉는다.

잃어버린 기억이 되살아

혼불문학관의 오직 한 편의 소설로 장식됐다

1930년대, 혼불의 배경이 된 마을, 사람들, 풍습이 처연하게 펼쳐있다. 그랬구나. 그랬었지. 혼불에 나오는 장면을 재현한 디오라마 앞에서 서성이는 발걸음이 애처롭다.

혼불문학관의 오직 한 편의 소설로 장식됐다

먼저 눈길을 잡는 것은 물레와 베틀이다. 나도 모르게 노래가 읊조려진다. ‘물레 돈다 물레 돈다’ 그래, 수천 바퀴, 수만 바퀴를 돌고 도는 물레구나. 할머니,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베틀이 거기 있었다.

결혼식 잔치 풍경도 오감을 자극했다. 어린 시절에는 관혼상제가 유일한 큰일이었다. 그때나 한 번씩 맛보게 되는 단맛도 미각을 자극했다. 한쪽에서 전을 부치고 국수를 말았다. 어르신들이 막걸리를 마시던 흙마당도 정겹다.

청암부인 장례식 장면에서 다시 한 번 과거로 갔다. 만장이 펄럭이는 사이로 떨렁거리던 상여소리, ‘아이고 아이고’ 끝없이 울던 사람들. 소설 속 이야기와 내가 겪은 어린 시절의 일화가 겹쳐진다. 신작로에 일어나던 뽀얀 먼지, 저녁이면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

이렇게 살던 때가 불과 수십 년 전인데, 백년도 채 지나지 않아 많은 것이 변했다. 상여는 고사하고 집에서 치루는 장례 절차는 아예 없어졌다. 지금은 보려야 볼 수 없는 풍경이 혼불 속에서 되살아났다.

혼불문학관의 오직 한 편의 소설로 장식됐다

그리움은 이유가 없다

서도역에 도착하자마자 느티나무 밑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지난 봄에 심었던 강낭콩이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 범인이 범행 장소에 다가선 느낌이랄까. 그러나 아무 것도 없었다. 서도역 느티나무 아래, 나를 기다리는 강낭콩의 붉은 꽃은 없었다. 지난 봄 극심한 가뭄에 말랐는지, 너무 깊이 묻어서 싹도 못 튀고 썩고 말았는지. 묵념하는 마음으로 한 동안을 서성이다 서도역사로 발길을 옮겼다.

1930년대 서도역

서도역, 그리움의 끝에 닿은 듯하다. 언제였던가, 홋카이도의 ‘행복역幸福驛’을 찾았다. 사방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던 해바라기밭, 그 한가운데서 만난 행복역은 웅크리고 앉아있는 소년 같았다. 만남의 반가움으로 손이라도 덥석 잡고 싶은 낡은 의자와 손때 묻은 손잡이, 행복이라는 글자가 무조건 좋았다.

지금은 서도역이다. 글의 길이다. 어쩌면 최명희의 혼불과 연결된 것이 운명인 듯싶다. 최명희 작가도 이 꼬부랑 철길에서 기차를 타고 어딘가를 다녀오곤 했으리라. 벤치에 앉았다. 가슴의 소리는 가라앉고 옥정호로 흘러가는지 연꽃이 향연을 지피고 있다.

언제나 한 시대는 가고 한 시대는 오지만, 이런 특별한 기분을 주는 것은 최명희,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쓰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고 고백했을까.

그리움은 언제나 최상급을 만든다

1930년대 서도역

사람들은 누구나 어딘가 떠나기를 원하다. 훌쩍 떠났다 돌아오는 여행,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여행이 아니다. 순간이 쌓여 그리움을 만들고 최상급의 그리움은 행동을 만든다. 이번 여행은 그렇게 생겨났다. 서도역을 그리워했던 만큼 위안을 받았다. 최명희의 혼불문학관은 벌써 몇 차례의 만남을 되풀이하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에도 최명희 문학관이 있으니 생전의 만남은 없었지만 최명희의 소설과는 구면인 셈이다. 그 언저리에 와서 새처럼 울었다.

이젠 돌아갈 시간이다. 돌아갈 곳이 있어 행복하다. 그땐 그랬지. 애기뻐꾸기들이 휘파람을 부는 사매마을에서 그리움의 계단을 한층 더 올라선 느낌이다. ‘그믐은 지하에 뜬 만월(滿月)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다.’

최명희 작가의 말이 내 낡은 기억을 비춰주고 있었다. 비록 돌아갈 수는 없지만 느껴볼 수 있는 과거, 나는 몇 번이나 되돌아보며 다시 오리라고 다짐했다.

<대동문화 102호, 2017년 9월 - 10월>

김을현 기자  somchan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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